963년(태조4) 9월 10일, 곽무위를 의심하게 된 북한왕 유계은은 궁중에서 연회를 열고 대신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그를 참살하려 했다.
이 낌새를 알아차린 곽무위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송나라 간첩 후패영도 유계은이 곽무위를 죽이려한다는 것을 알고 자객 10여 명을 이끌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북한왕 유계은이 침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을 때 후패영이 쳐들어가서 죽였다. 이 사건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던 곽무위도 후패영을 따라 궁에 들어갔다.
후패영이 거사를 끝내고 미처 나올 새도 없이 그가 보낸 자객들이 창문으로 뛰어들어 후패영을 비롯한 10여명을 모두 사살했다. 곽무위는 후패영을 죽여 입을 막고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유계은이 피살되자 북한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계은의 동생 유계원(劉繼元)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입궁해 혼란국면을 안정시켰다.
이때 송의 대군이 북한 경내에 진입했다. 이리하여 유계원은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화급히 사신을 거란에 보내 지원병을 요청하고 시위도우후(侍衛都虞侯) 유계업(劉繼業)에게 단백곡(團柏谷)을 지키도록 명했다.
후패영이 북한왕 유계은을 죽인 일은 마치 한(漢)나라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했을 때 썼던 이간책과 흡사하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漢武帝)가 육군 5만 명과 수군 7천 명을 동원해 압록강까지 진군해 고조선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전쟁은 장기전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자 한무제는 한편으로 정면대결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조선의 지배층을 와해시키려는 이간전(離間戰)을 채택했다.
그 결과 왕검성(王儉城)의 고조선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져 다투게 되었다. 우거왕(右渠王)은 강경파로 성을 끝까지 지키려 했으나, 태자는 온건파로 한(漢)나라와 화해를 주장했다.
그때 온건파 신하였던 참(參), 이계상(尼谿相), 한음(韓陰), 노인(路人)과 장군 왕협(王陜)은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나라에 항복한 ‘참’은 자객을 보내 우거왕(右渠王)을 암살했다.
그리고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는 백성을 선동하여 왕검성을 사수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재상 성기(成己)를 암살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108년 여름, 고조선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으며, 한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400여 년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사군(漢四郡): 한무제(漢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 등 4개 군(郡)이다.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313년 고구려에 의해 소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421년간 이민족의 지배를 감수해야 했다.
이야기는 다시 북한에 밀파되었던 두 명의 간첩에게로 돌아간다. 후패영이 북한왕 유계은을 죽인 후 바로 곽무위에게 피살될 무렵, 다른 한명의 간첩 혜린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후패영사건이 노출되고 송군이 곧 당도하게 되자 혜린은 급히 송군이 있는 쪽으로 도주했는데, 도중에 북한군에 체포되어 태원으로 압송되었다.
혜린의 진상을 아는 북한의 장수 이초(李超)가 혜린을 처형할 것을 단호히 요구했다. 그러자 곽무위가 직권을 이용해 혜린을 석방하고 기회를 보아 이초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노출을 다시 한 번 막았다.
병법에서 “간계(間計)가 성사되기 전에 기밀이 누설되면 간첩과 연관된 사람은 다 죽게 된다.”고 했다. 일을 하기 전에 발각되어 ‘사간(死間)’이 되어버린 혜린은 더 이상 공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란 바로 이와 같이 잔인하고 무자비한 것이다. 송나라의 북한 내 간첩활동은 병법에서 말하는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북한에 있던 간첩 세 명 중에서 두 명은 노출되고 그들을 지원했던 곽무위 한 사람만 남았다. 홀로된 그는 단신으로 간첩활동을 벌였다.
그는 북한조정에 “고립된 성에서 송나라의 백만대군과 맞서 싸우는 것은 달걀로 돌을 치는 격”이라는 말을 살포했다. 칼로 할복하려는 시늉을 하며 자신의 간첩 행각을 은폐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곽무위는 지나치게 조신했다. 북한왕과 기타 북한의 대신들에게 보내는 조광윤의 조서를 받았을 때, 그는 북한왕 유계은에게 보내는 조서만을 골라 지금의 왕인 유계원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40여 부는 눌러 놓고 조신들에게 전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내외에서 호응하는 전술을 쓰려던 조광윤의 계획이 크게 차질을 빚게 되고 북한조정을 분열시키려는 이간책도 기대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간전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968년(태조9) 2월 조광윤은 북한 친정에 나섰다. 그가 대군을 통솔해 북한 경내에 진입하자 북한도 군사를 출동시켜 맞섰다.
그러나 접전이 개시되자마자 북한군은 송군의 맹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번번이 패퇴했다. 송군은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순조롭게 진군했다.
노주에 도착한 후 조광윤은 성 안에서 18일간 묵었다. 노주의 행영(行營)에서 조광윤은 체포한 북한간첩을 심문하고 ‘역(逆)스파이계책’을 이용하려 했다. 조광윤은 북한의 도성 태원성 내의 상황을 알아내려고 북한의 간첩을 심문했다. 북한의 간첩이 말했다.
「성 안의 백성들이 혹독한 고통 속에 시달린 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왕래하는 전차(戰車)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원한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조광윤의 가슴 속에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고 천하를 통일해 정치적 포부를 펼쳐 보려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그해 3월, 그는 즉시 노주에서 출발해 파죽지세로 북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태원성 밑에까지 접근해 겹겹이 포위했다.
송군은 태원성을 포위했지만 조광윤의 지시에 따라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광윤은 정치공세를 이용해 태원성 내의 북한 지배자의 항복을 이끌어내고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전쟁을 끝마치려 했다.
그러나 태원성 안에 있는 북한왕 유계원은 군량이 충족하고 성을 지키고 있는 정예군과 곧 오게 될 거란의 지원군을 믿고 완강하게 저항하고 투항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쪽 군대는 대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후주 때 투항한 남당의 장군 진승소(陳承昭)가 조광윤에게 건의했다.
「태원성은 분하수(汾河水)와 인접해 있습니다. 태원성의 동쪽에 큰 둑을 쌓아 분수(汾水)를 막으면 물이 태원성 안으로 흘러들 것입니다. 이러면 희생 없이 성을 공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별 다른 방법이 없는 조광윤은 진승소의 건의에 동의했다. 진승소는 한 달 동안의 철저한 준비를 거쳐 분하에 둑을 쌓았다. 5월 2일, 태원의 남쪽 성이 분수에 잠기게 되고 큰물이 외성을 뚫고 성안으로 흘러들었다.
성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북한군도 송군이 분하에 제방을 쌓는 것을 보고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미리 물을 막는 기구들을 준비해 성벽을 따라 장애물을 설치했다.
그 결과 진승소의 물로 공격하는 계획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송군은 여전히 태원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 내부에 있던 곽무위도 도주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막무가내로 북한군 내부를 돌며 투항할 것을 권유하는 바람에 북한왕 유계원의 의심을 사게 되어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 조정에 잠입했던 송나라의 간첩 세 명은 모두 죽고 말았다. 태원성을 포위한지 3개월이나 지났으나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오랫동안 객지에서 싸워 온 군사들을 보고 조광윤은 마음이 불타는 듯 초조했다. 일부 장수들은 결사대를 조직해 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조광윤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북한을 포기할지언정 그대들이 창칼 앞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득불 송나라 대군은 변경(汴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의 북벌전쟁에서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은 이간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인자한 조광윤이 북한백성들의 희생을 걱정해 공성(攻城)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적절한 시기, 지리환경, 인화 등 제반 요인에 변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