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14)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위엄과 온정을 동시에 보이니 허(虛)와 실(實)을 추측할 수 없다

 

고금의 전례를 놓고 볼 때 훌륭한 군사가들은 주적과 싸울 때 먼저 기타 경거망동의 위험이 있는 적수들에 대해 왕왕 ‘헛총질’을 한다든가 ‘허장성세(虛張聲勢)’로써 위협을 주고 그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이는 주요 군사행동이 불의의 방해를 받아 불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수조치였다.

 

조광윤은 남당정권과 대응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다.

 

조광윤은 즉위 초기에 회남에서 이중진의 반란을 평정한 후, 전투함대의 작전훈련을 개시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이를 본 남당은 송나라가 곧 남당을 공격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사실 이는 조광윤이 남당을 겁주기 위한 헛총질이었다.

 

남당이 경거망동해서는 안되며 그렇지 않을 때는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남당을 때려 부수겠다는 경고메시지였다.

 

이런 공갈은 확실한 효과를 가져왔다. 남당은 변함없이 송조(宋朝)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배신할 엄두를 못 냈다.

 

조광윤은 뒷걱정 없이 후촉, 남한 등 다른 할거정권들을 평정할 수 있었고 통일의 국면을 거침없이 타개해 나갔다.

 

한편, 남당정권이 딴 마음을 안 먹도록 안심시키고 다독거리기 위해 조광윤은 적절한 조치들을 취했다.

 

예를 들어, 그가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남당의 한 낮은 관리였던 두저(杜著)라는 사람이 상인으로 가장해 송나라에 망명했고, 남당의 팽택(彭澤)현령 설량(薛良)도 남당을 배신하고 귀순해 ‘평남지책(平南之策)’을 내놓았다.

 

이 사건은 당시의 남당군주 이경으로 하여금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남당을 안심시키기 위해 조광윤은 “포로로 잡은 적의 군사에 대해서는 적당하게 안배하고 과감히 등용해야 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을 어기고 두저의 목을 베어 대중에게 보이고, 설량은 노주아교(盧州牙校)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당의 장병이나 관리들이 다시는 송나라로 망명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남당왕 이경에게는 송나라가 남당을 멸망시킬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리하여 송조 초기에 두 나라는 아무런 문제없이 조용히 지냈다. 그동안 남당은 송나라를 두려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송나라의 평정대상에 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송조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시종일관 조신하게 행동했다.

 

송나라에 큰 명절이 있을 때마다 사절을 보내 두둑한 선물로 축하했다. 이에 대해 조광윤도 늘 예의를 갖춰 답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송조(宋朝)든 후주든 다 남당을 욕심내고 있었으며 단지 책략이 서로 다를 뿐이었다.

 

963년(태조4)에 이르기까지 조광윤은 두 절도사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내경제를 다스리는데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군사전략적으로는 형남과 호남을 통일해야 했기 때문에, 남당에 대해서 더욱 은덕을 베푸는 책략을 구사해 나갔다.

 

예를 들어, 조광윤은 회남전투에서 후주에 투항했던 남당의 병사들을 위문하도록 명하고, 남당에 사신을 보내 전투로 인해 흩어졌던 이산가족(離散家族)들에게 통보해 그들의 상봉을 도왔다. 현재 남북한 간에 이산가족을 상봉시키고 있는데, 이미 일천년 전에 송태조 조광윤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는 투항한 남당병사들의 가족에 대해서는 송나라에서 살고 싶어 하는 자는 살게 하고 남당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는 돌려보냈다.

 

이전에 후주 세종 때 회남전투에서 투항한 남당병사들에 대해서는 늙고 약한 자를 등록하게 한 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조광윤의 이 정책은 크게 민심의 호응을 얻었고, 그 사람들은 더 이상 남당과 송나라를 두 개 나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민심의 통일을 이룸으로써 이후의 진정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탄탄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964년(태조5), 남당에 큰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 이 소식을 들은 송태조는 남당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송나라와 남당의 국경통금령을 해제하고 강남, 강북의 백성들이 자유롭게 무역거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965년(태조6)에는 남당이 또 날씨가 가물어 농민들의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자, 송태조는 쌀과 밀 10만석을 지원해 기근을 구제하도록 했다. 968년(태조9)에 남당은 또다시 흉작이 들고 농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되자, 송태조는 특별히 남당에 쌀 10만석을 하사해 남당백성의 고통을 덜도록 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이든 군사적 목적이든 송태조가 남당에 대해 실시한 여러 정책들은 전략적으로 이른바 이익으로써 유인하는 술책이며, 남당을 안정시킴으로써 이후의 통일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효과를 놓고 볼 때 이 일련의 조치들은 송태조의 큰 도량과 덕목을 보여주었고, 다른 면으로는 남당통치자를 안심시키는 작용을 했다.

 

남당 중기의 이경이든 후기의 이욱이든 다 송조에 대해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굴복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남당을 멸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송나라에 대한 의구심을 늦추고 송나라에 대한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송나라와 남당이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송나라가 여타 할거정권을 수복하기 위한 시간을 벌었고 중국 통일의 발걸음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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