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한(北漢) 공격
용병술이란 병법에서 말하는 ‘계책(計策)’이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계책을 꾸미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로 되고, 군자의 체통을 지키다가도 소인배의 작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남당을 평정하고 북한을 와해시키는 과정에서 조광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계책지법을 적용했다. 큰 방향만 정확하다면 군자도 ‘소인지책(小人之策)’인 이간전(離間戰)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조광윤은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에 따라 처음에는 비좁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정복하지 않으려고 했다.
북한을 방패로 이용해 거란과의 충돌을 막고 사방을 평정하기 전에 북쪽 국경에서 일어나는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음 놓고 남쪽을 먼저 정벌하려면 북한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헛총질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국경의 첩자를 통해 북한왕 유균에게 이런 말을 전한 적이 있다.
「군주가문과 조씨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지간이고 서로 굴복하지 않았소. 오늘 나와 당신은 서로 지은 원한이 없는데 왜 우리를 괴롭히는 거요. 만일 중원을 차지할 뜻이 있다면 태항산(太行山)으로 내려와서 사나이답게 한판 붙어 승부를 내봅시다.」
조광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은 ‘고산진호(敲山鎭虎)’의 계책으로 ‘산을 두드려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북한이 경거망동하거나 송나라가 변방을 평정하는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었다.
이때 송나라에 저항할 힘이 없지만 그렇다고 귀순할 마음도 없는 북한왕은 “이 작은 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할까봐 두려워서일 뿐입니다.”라고 퍽 감상적인 답장을 보내왔다.
이에 불쌍한 생각이 든 조광윤은 북한에 유균이 재위하고 있는 한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해가고 있었다. 조광윤이 후촉을 평정한 후 북한왕 유균이 병사하고 그의 양자(養子) 유계은(劉繼恩)이 뒤를 이었다.
그는 천하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고려할 때 호랑이를 키워 후환을 남길 것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할거정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광윤은 선남후북정책에서 잠시 이탈해 북한을 먼저 평정하고 나서 남한 등 남쪽 나라들을 평정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유균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비록 북한왕이 이미 타인에게 승계되었어도 군사력을 동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군사적 공격보다는 ‘이간전(離間戰)’을 쓰기로 했다.
그는 전전산지휘사(殿前散指揮使) 후패영(侯覇榮), 혜린(惠璘)에게 북한정권에 파고들어 모반을 획책하고 와해시키도록 했다.
이 두 사람은 용의주도하게 활동을 벌여 북한의 재상 곽무위(郭無爲)를 매수했다.
그의 배려로 후패영과 혜린은 북한 궁정의 공봉관(供奉官)으로 임명되어 자유자재로 왕궁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곽무위는 본래 무당산(武當山) 도사(道士)였는데, 담백한 생활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그는 후한군(後漢軍) 진영으로 곽위(郭威)를 찾아갔다.
그가 몹시 마음에 든 곽위는 신변에 책사(策士)로 두고 싶어 했으나, 부하들이 반대해서 그만 단념했다.
곽무위는 다시 북한왕 유균을 찾아가서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고 재상까지 되어 북한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유균의 사후에 유계은이 즉위한 후 총애를 잃게 된 그는 겉으로는 지위가 올라갔으나 실은 ‘빈 배의 사공’에 지나지 않는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
이 변화는 권세욕이 강한 곽무위로 하여금 마음의 균형을 잃게 하고 “사람은 북한군 진영에 있으나 마음은 송나라에 가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송나라에 이용되고 첩자가 되어, 결국은 ‘무위(無爲)’를 추구하는 도사(道士) 출신이 ‘유위(有爲)’를 추구하게 된 셈이었다.
손자(孫子)는 말했다.
「무릇 10만 군사를 동원하여 천리를 출정하려면 백성이 내야 할 비용이나 관공서의 지출은 매일 천금에 달하게 될 것이다.
전국은 안팎으로 어지러워 불안에 싸이고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대열은 길에서 지치게 되어 경작을 못하는 세대가 70만에 달할 것이다.
이렇게 몇 년간 소모하는 것은 단지 하루아침의 승리를 위해서일 뿐이다. 각종 작위와 봉록, 금전 따위만 중요시하고 ‘간첩지법(間諜之法)’을 중용하지 않아 적의 상황을 무시한 대가로 실패를 초래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정한 인간이며 훌륭한 장수가 아니며 군주의 보좌가 아니며 승리가 아닌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군사를 일으키고 대중을 동원해 살상과 토벌을 일삼는 실전보다 ‘간전지법(間戰之法)’은 일종의 ‘인자(仁慈)한 전법(戰法)’인 것이다. 조광윤은 인자한 정치가이고 군사가였다.
매번 전쟁을 벌이기 전에 그는 가능한 한 이간전을 이용해 적 내부에서 모반을 획책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이와 같이 실전과 이간전, 용병과 계책, 군사와 정치를 복합적으로 결합한 공격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송나라는 종래로 전쟁의 진흙탕 속에 오래 빠져있지 않았다.
출병의 기회를 장악하고 정보를 밝혀내는 간첩전의 의미를 놓고 볼 때 조광윤의 이간전은 성공적이었다. 송나라가 북한에 파견한 첩자 두 사람은 북한의 정치상황을 조광윤에게 보고했고 또 북한군의 군사방어조직에 관한 정보를 비밀리에 전해왔다.
조광윤은 북한왕 유계은의 승계를 인정하지 않고, 후촉과 연합해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다는 명분으로 963년(태조4) 8월 북한토벌을 결심했다.
조광윤은 소의절도사 이계훈(李繼勛)을 주장으로 임명하고, 시위보군도지휘사 당진(黨進)을 부장으로, 선휘남원사(宣徽南元使) 조빈을 도감으로 임명해 북한평정군을 구성했다.
동시에 후패영, 혜린에게 밀령을 내려 계속 북한에 머물면서 동정을 살피고 안팎으로 호응하도록 했다.
그리고 북한정권을 와해시키려는 목적으로 조광윤은 또 먼저 사자를 파견해 조서를 들고 태원으로 가도록 했다.
조서에는 북한왕 유계은이 항복할 것과 만일 투항한다면 송나라는 유계은을 평로(平盧)절도사로 봉하고, 재상 곽무위는 안국(安國)절도사로 봉할 것이며, 기타 북한 조정의 대신과 장수들에게도 중임과 작위를 내릴 것이라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