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6)이균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해 송나라를 공격하고 있을 때 이중진은 비밀리에 그의 심복 적수순(翟守珣)을 이균에게 보내어 남북에서 송나라를 협공하려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적수순은 조광윤의 재능과 위력에 대해 탄복해 마지않는 사람이었다. 이중진이 반란군 이균과 연락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했지만 감히 간언을 못한 그는 노주로 가지 않고 곧바로 경성으로 갔다. 그는 추밀승지로 있는 친구 이처운(李處耘)을 찾아가 황제를 알현케 해 달라고 청했다. 비밀리에 적수순을 만난 조광윤은 이중진이 이균과 연락을 하려는 상세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송태조 조광윤이 말했다. 「나는 이균을 칠 생각이지 이중진은 건드리고 싶지 않네.」 이에 적수순이 말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중진이 이균과 연락하는 것은 역시 출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조광윤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앞뒤가 차단될 거요. 만일 내가 이중진에게 철권(鐵券)을 준다면 그가 나를 믿어주겠소?」 적수순이 말했다. 「이중진은 풍부한 경력에 맞지 않게 일을 졸속하게 처리하고 또한 완고하기 때문에 귀순할 마음이 전혀 없을 것입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5) 2. 회남(淮南)절도사 이중진(李重進)의 반란 평정 『손자병법』의 「용간편(用間篇)」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현명한 군주나 장군이 싸우기만 하면 적을 이길 수 있고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사전에 적에 대한 파악을 잘했기 때문이다. 사전에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귀신에게 기도하거나 길흉을 예측하거나 밤하늘의 별의 운행을 살펴보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후주의 회남(淮南)절도사였던 이중진(李重進)도 이균과 연합해 송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했다. 그들은 남북으로 호응해 이균은 서북의 노주(潞州)에서, 이중진은 동남의 양주(揚州)에서 반기를 들어 송나라의 앞뒤를 협공하려 했다. 이러한 부득이한 상황에서 조광윤은 먼저 이중진을 스스로 미루도록 계책(計策)을 써서 송군이 뒷걱정 없이 이균을 정벌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했다. 이중진은 본래 후주의 개국공신이었고, 또 태조 곽위 누이의 아들이었다. 952년 1월, 그는 무신군절도사를 겸했고, 세종시기에는 시위마보군도지휘사를 겸했다. 그러나 이중진은 평소 교만했다. 그에게 있어서 조광윤은 일개 수하의 병졸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중진이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4)병법에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성(城)을 공격하는 것은 부득이한 방법이다. 성을 공격하는데 쓰이는 소차(巢車)를 제조하고 병기를 준비하는데 석 달이 걸린다. 성의 토벽을 쌓는데도 석 달이 걸린다. 장수들은 불만이 많으나 군대를 몰아 세워 개미떼처럼 성을 기어 올라가게 하면 병사들 3분의 1의 사망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성을 공격하는 재앙이다!” 옛사람의 훈시가 이와 같으니 조광윤도 오래 동안 지체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군은 쉬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지만 아군은 성을 공격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있어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피동적(被動的) 상황을 벗어나고 속히 택주를 함락하기 위해 조광윤은 공학좌상지휘사 마전의(馬全義)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그는 장병들이 완전히 지치기 전에 즉각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광윤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사대를 이끌고 먼저 성을 공격하도록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전의는 과연 조광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침내 성 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전투 중 팔뚝에 화살을 맞았는데도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3)병법에 “갑옷을 말아 들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백리를 다투어 급행군 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조광윤은 당연히 이균이 택주를 점령한 목적을 알고 있다. 그는 석수신, 고회덕 두 장군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이균이 태항을 내려오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한다. 장병을 급파해 요새를 막도록 하라.」 조광윤의 의도는 두 장군이 급행군하여 유리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이균의 군대가 태항산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는 이균의 부대를 택주에서 제압해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낙양유수(洛陽留守) 향공(向拱)과 추밀직학사 조보도 “불의에 공격을 가해 속전속결하면 승전할 수 있다.”고 조광윤에게 건의했다. 이 건의는 조광윤의 생각에 딱 들어맞았다.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되었다. 조광윤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조광윤은 960년 5월 21일 변경(汴京)에서 출발해 5월 24일에 영양(榮陽)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급히 황하를 건너 신속히 북상해 태항산에 접근했다. 그때 태항산 산로는 좁고 험악하여 송나라 대군의 행군은 애를 먹었다. 황제인 조광윤이 솔선해서 비지땀을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2)사실 조광윤은 이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후주의 중신이며 세종 시영(柴榮)과 형제처럼 지냈던 이균은 후주에 충성할 사람이고 결코 후주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주 세종은 그를 소의절도사로 봉하고 노주를 수비하도록 했으며 그 외의 4개 주를 통솔하도록 했다. 두 개의 중요한 재부의 공급지역인 하동(河東)과 하북(河北)을 관할하게 된 그는 당시 후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번진(藩鎭)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절도사로 있는 동안 그 지역의 황제인양 횡포를 부려 세종마저도 삼분 양보했다. 이균의 성격은 매우 복잡하여 비록 포악하고 제멋대로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했다. 이균은 성격이 광폭하여 한마디만 거슬려도 죽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어진 어머니가 병풍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서를 호소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귓등에도 듣지 않지만 어머니가 입을 열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방면하곤 했다. 이균은 그를 중서령(中書令)으로 봉하기 위해 조광윤이 보낸 사자가 조서를 가지고 갔을 때 자신의 세력을 믿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후주 태조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1)조광윤은 시대요구에 부응하여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진교병변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등극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황제에 오르더라도 이전 왕조와의 인연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반대하는 자가 없을 리 만무했다. 후주의 옛 신하들 중에 조광윤을 달갑잖게 여기던 소의군절도사 이균과 회남절도사 이중진 등 두 번진(藩鎭)이 끝내 도전장을 던졌고 한 차례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조광윤은 도량이 넓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비록 각지 절도사 중에 이균과 이중진처럼 그가 황제에 등극한데 대해 불복하는 자가 있었지만 “전쟁은 전쟁이고 평정은 평정”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속 좁은 사적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두 명의 이씨(李氏) 절도사들의 반란을 차례로 토벌한 그는 내친김에 천하의 제후와 번진을 다 쓸어버리고 빛나는 ‘대송제국(大宋帝國)’을 세울 웅심을 갖게 되었다. 1. 소의군(昭義軍)절도사 이균(李筠)의 반란 평정 노주(潞州)의 소의군절도사 이균은 원래 완고한 자였다. 외지에서 절도사로 8년 이상 오래 근무했던 그는 자신의 세력이 강대하다고 여겨 공개적으로 송태조 조광윤에게 도전장을 냈다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7)조광윤이 입성한 후 입궁하지 않자 재상 범질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전전도점검공관으로 찾아 갔다. 조광윤은 대신들이 온 것을 보고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6군(軍)의 압박을 못 이겨 하루 만에 이렇게 됐습니다. 하늘과 땅에 죄를 지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범질은 내심 병변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조광윤의 곁에서 호위하고 있던 장군 나언괴(羅言瑰)가 눈을 부라리며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고 범질에게 벽력같이 소리 질렀다. 「우리는 천하의 백성들을 구하고자 오늘 새로운 천자를 추대했소!!」 여러 번 병변을 겪은 대신들은 새로운 천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죽음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서야 범질이 백관을 거느리고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범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조광윤을 모시고 입궁하여 숭원전(崇元殿)에 도열했다. 황혼이 질 무렵, 환관이 어린 황제를 이끌고 들어와 보좌(寶座)에 앉혔다. 조광윤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에게 마지막 예를 올렸다. 곁에 서있던 한림학사 도곡(陶谷)이 소매에서 선양조서(禪讓詔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6)진교역에서 회군하여 별다른 충돌 없이 경성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먼저 객성사(客省使) 반미(潘美)를 급파해 조정대신들에게 병변사실을 통보하고 협조를 구하도록 명했다. 또 경성 안에서 내응하고 있던 석수신, 왕심기 등에게 사람을 보내 함부로 사람을 살육하지 못하도록 했다. 반미가 병변사실을 알리려 입궁했을 때, 재상과 문무대신들은 아직 아침 조회를 하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병변소식에 경악과 후회가 교차한 재상 범질이 왕부의 손을 잡고 이를 깨물며 말했다. 이때 범질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조장군(趙將軍)을 파견하는데 너무 소홀했소이다! 너무 성급하게 대처했어요! 이런 사변이 일어나다니, 우리의 죄가 크네!」 범질은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현실이 된 이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문무대신들은 병변소식에 놀라지 않았다. 올 것이 온 것뿐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 조용히 인자(仁者)의 도래를 기다렸다. 6군을 통솔해 경성에 당도한 조광윤은 장병들이 황궁의 명덕문(明德門)으로 안내하려 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고 인화문(仁和門)을 통해 입성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모두 군영으로 돌아갈 것을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5)모든 장령들이 그의 요구대로 복종할 의사를 표명하자 조보는 자신에게 먼저 승부수를 던지고 주동적으로 이 역사적 사명을 떠안기로 했다. 그는 조광의, 이처운 등 측근들과 함께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웠다. 장수들은 각자 관할하는 병영으로 돌아가 부대가 이동하는 행동요령을 주지시키는데 만전을 기하고 명령을 기다리도록 한다. 군대리부(軍隊吏部) 곽정빈(郭廷贇)은 밤새도록 말을 달려 경성에 돌아가 석수신과 왕심기에게 이번 병변의 상황을 통보하고 내응하도록 조치한다. 또 전령관(傳令官) 초소보는 경성에 돌아가 조광윤의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안전한 사원(寺院)으로 피신시킨다. 이때부터 조보는 벌써 안정적인 지휘능력을 갖춘 재상의 풍모를 과시했다. 이로써 한 차례의 병변이 발발하게 되었다. 조광윤이 편안히 잠자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황제’의 운명은 형성되었다. 960년 1월 4일 동이 틀 무렵, 조광의와 조보가 조광윤의 군막 안으로 들어와 지휘관들이 모두 막사 앞에 도열해 있으니 빨리 군복을 갖추고 밖으로 나오라고 재촉했다. 조광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동생에게 “선황제(先皇帝)인 세종 시영(柴榮)의 은혜를 배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4)금군 도압아(都押衙) 이처운(李處耘), 전전도우후(殿前都虞侯) 이한초(李漢超), 내전도우후(內殿都虞侯) 마인후(馬仁瑀) 등 금군의 맹장들은 공봉관(供奉官)으로 있는 조광윤의 아우 조광의(趙光義)와 함께 이러한 장병들의 의논을 듣고 군부의 책략가인 절도장서기(節度掌書記) 조보(趙普)를 찾아가서 상의해 보기로 했다. 이들이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장령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장서기 조보가 짐짓 화를 내는 척 했다. 「황제 옹립의 획책은 막중한 일이네! 반드시 심사숙고해서 도모할 일이네. 당신들은 어떻게 함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려 하는가?」 조보가 이어서 말했다. 「외적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는데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물리치겠는가? 먼저 적을 물리친 다음 돌아와 다시 이 일을 논의하기로 합시다.」 그러자 여러 장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현재 많은 정사(政事) 가운데서 가장 시급한 일은 경성에 가서 태위(太尉)를 황제로 책립하는 일입니다. 이번 출정을 조금 미루어도 적을 물리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태위께서 책립에 응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