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에 “갑옷을 말아 들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백리를 다투어 급행군 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조광윤은 당연히 이균이 택주를 점령한 목적을 알고 있다. 그는 석수신, 고회덕 두 장군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이균이 태항을 내려오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한다. 장병을 급파해 요새를 막도록 하라.」
조광윤의 의도는 두 장군이 급행군하여 유리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이균의 군대가 태항산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는 이균의 부대를 택주에서 제압해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낙양유수(洛陽留守) 향공(向拱)과 추밀직학사 조보도 “불의에 공격을 가해 속전속결하면 승전할 수 있다.”고 조광윤에게 건의했다. 이 건의는 조광윤의 생각에 딱 들어맞았다.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되었다.
조광윤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조광윤은 960년 5월 21일 변경(汴京)에서 출발해 5월 24일에 영양(榮陽)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급히 황하를 건너 신속히 북상해 태항산에 접근했다. 그때 태항산 산로는 좁고 험악하여 송나라 대군의 행군은 애를 먹었다. 황제인 조광윤이 솔선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돌을 걷어내고 길을 만들자 장수와 신하들도 모두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서 태항산에는 금방 길이 뚫렸다. 송나라 대군은 거침없이 태항산을 넘어 택주성 밖에 당도했다.
이균은 반란군을 거느리고 4월 14일에 택주를 점령한 후 5월 초에 북한군과 연합을 이루었다. 일을 차질 없게 하기 위해 이균은 장자 이수절을 상당(上黨)에 남아 후방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송군(宋軍)을 공격하기로 했다. 밤낮으로 급행군하여 태항산의 좁은 입구에 당도한 송군은 험준한 요새를 장악해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 때 이균의 부대는 아직 택주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균을 토벌하려는 고회덕, 석수신은 벌써 조광윤의 명령대로 신속하게 태항산입구를 통제하여 이균의 군대를 저지하고 그의 장졸이 한 명도 태항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5월 5일, 고회덕, 석수신의 선발부대가 이균의 부대와 택주에서 교전을 벌였는데, 이균의 장병 3천명을 사살했다. 5월 29일, 두 장군은 또 택주 남쪽에서 이균의 3만 군대를 대파하고, 북한(北漢)의 주장인 하양절도사 범수도(范守圖)를 생포하고 이균 군대를 감독하던 북한의 노찬을 죽였다.
이균은 패배하여 다시 택주 성안으로 도주한 후 성을 고수했다. 6월 1일, 송태조 조광윤이 군대를 통솔하여 택주에 당도했다. 그는 고회덕과 석수신에게 택주성을 공격하도록 독촉했다. 이균이 완강하게 성을 고수하고 있는 바람에 송군은 연달아 10일 동안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택주성을 공략하지 못하자 전국(戰局)은 대치상태에 빠져들었다.
성안에 갇힌 이균은 마음이 불타듯 초조했다. 성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지만 송군이 성 밖에서 포위하고 사방으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뚜렷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이균의 첩실 유씨(劉氏)가 권유했다.
「수백 명 기마병으로 포위망을 뚫고 나가 아들이 지키고 있는 상당으로 갑시다. 거기서 빨리 북한군의 지원을 얻도록 하세요. 성을 사수하는 책략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균의 좌우 장수들은 이 건의를 단호히 일축했다. 포상금을 노리고 이틈에 이균을 납치해 투항하려는 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을 공격하는 자는 속전속결을 원하기 때문에 성을 고수하기만 하면 군량이 바닥난 저들이 필연코 물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