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13>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4)

병법에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성(城)을 공격하는 것은 부득이한 방법이다. 성을 공격하는데 쓰이는 소차(巢車)를 제조하고 병기를 준비하는데 석 달이 걸린다. 성의 토벽을 쌓는데도 석 달이 걸린다. 장수들은 불만이 많으나 군대를 몰아 세워 개미떼처럼 성을 기어 올라가게 하면 병사들 3분의 1의 사망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성을 공격하는 재앙이다!”

옛사람의 훈시가 이와 같으니 조광윤도 오래 동안 지체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군은 쉬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지만 아군은 성을 공격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있어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피동적(被動的) 상황을 벗어나고 속히 택주를 함락하기 위해 조광윤은 공학좌상지휘사 마전의(馬全義)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그는 장병들이 완전히 지치기 전에 즉각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광윤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사대를 이끌고 먼저 성을 공격하도록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전의는 과연 조광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침내 성 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전투 중 팔뚝에 화살을 맞았는데도 그는 고통을 참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조광윤은 시위부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 신속히 전과를 확대했다. 택주성은 드디어 송군에게 함락되고 이균은 분신자살하고 북한의 재상 위융은 생포되었다.

병법에서 “적을 사살하는 것은 바로 분노이다.”고 했다. 조광윤이 마전의에게 성을 강공할 것을 명령했을 때, 마침 마전의는 계속 성을 함락하지 못해 분노에 차있던 참이었다. 그는 화살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고 용맹스럽게 성을 공격해 마침내 택주성을 함락했던 것이다. 이균이 죽자 부하 장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송나라에 투항했다.

6월 17일, 송나라 군사가 승승장구하여 노주를 공격하자 이균의 아들 이수절이 성과 함께 투항했다. 북한왕 유균은 이균의 군사가 패한 것을 보고 급히 군대를 진양(晋陽)으로 철수시켰다. 이로써 조광윤은 황제에 등극한 후 처음으로 군사적 책략을 보여주고 전쟁을 하자마자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크게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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