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09>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7)

조광윤이 입성한 후 입궁하지 않자 재상 범질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전전도점검공관으로 찾아 갔다.
조광윤은 대신들이 온 것을 보고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6군(軍)의 압박을 못 이겨 하루 만에 이렇게 됐습니다. 하늘과 땅에 죄를 지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범질은 내심 병변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조광윤의 곁에서 호위하고 있던 장군 나언괴(羅言瑰)가 눈을 부라리며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고 범질에게 벽력같이 소리 질렀다.

「우리는 천하의 백성들을 구하고자 오늘 새로운 천자를 추대했소!!」

여러 번 병변을 겪은 대신들은 새로운 천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죽음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서야 범질이 백관을 거느리고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범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조광윤을 모시고 입궁하여 숭원전(崇元殿)에 도열했다. 황혼이 질 무렵, 환관이 어린 황제를 이끌고 들어와 보좌(寶座)에 앉혔다. 조광윤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에게 마지막 예를 올렸다. 곁에 서있던 한림학사 도곡(陶谷)이 소매에서 선양조서(禪讓詔書)를 꺼내 감회어린 목소리로 읽었다. 후주의 3대 황제 공제(恭帝)가 조광윤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한다는 조서였다. 이제 막 여덟 살 된 황제 시종훈은 자신이 내린 조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마냥 동그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곡이 조서를 모두 읽자 환관이 시종훈을 보좌에서 끌어내렸다. 재상이 조광윤을 부축해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또다시 소리 높여 외쳤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조광윤은 곧바로 조서를 내려 후주의 공제(恭帝)를 ‘정왕(鄭王)’으로, 부황후(符皇后)는 ‘주태후(周太后)’로 봉하고 그들에게 반역 이외의 죄는 모두 용서하겠다는 면사금패(免死金牌)를 주어 따뜻하게 보호하도록 명했다. 또 그들이 낙양으로 옮겨 살면서 조상제사를 자손대대로 모실 수 있도록 윤허했다. 이로써, 오대(五代)시기는 마지막 왕조 후주와 함께 역사에서 종언을 고하게 된다.

1월 5일 나라 이름을 ‘송(宋)’으로 정하고, 연호를 ‘건륭(建隆)’으로 선포했다. 국호를 송(宋)으로 정한 것은 조광윤이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귀덕절도사의 관할지역이 춘추시기에 ‘송국(宋國)’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가 송나라로 바뀌는데 모든 일은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 그는 새벽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포(黃袍)를 걸치고 봉기했으며, 오후에는 도성을 점령하고 대신들을 굴복시켰으며, 저녁에는 선양을 마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은 조보와 조광의의 사전계획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안배가 되었던 것이다. 거사의 일정을 새해 첫날로 잡은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정초의 들뜬 분위기를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날의 처음이고, 새로운 빛이 뜨는 첫날에 세상의 주인이 바뀐다.”는 깊은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후주를 세운 곽위(郭威)가 일으킨 전주병변(澶州兵變)도 951년 정초였으며, 후주 세종 시영(柴榮)도 6년 전 954년 정초에 황위에 올랐다.

 

청년 조광윤이 24세에 말단병사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34세에 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신분인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광윤의 성공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성공모습과는 차별성을 띄고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당당한 풍모와 강인한 체력, 하늘을 찌를 듯한 고강한 무공(武功)과 드높은 기개(氣槪), 뛰어난 지략, 만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 뛰어난 임기응변과 위기대처능력, 겸손하고 후덕한 인품, 남다른 친화력 등 범인(凡人)들이 쉽게 따를 수 없는 개인적 우수성을 간직하고 있는데다가, 보통사람들보다 더 인내하고 신중을 기하면서 자신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주위의 온갖 유혹에 흔들림 없이 지조를 지키면서 전력투구했던 과실(果實)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의 공도 크지만 조광윤 자신이 스스로 쌓아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조광윤은 후주 말기의 시대적 요청에 의해 군 장령과 백성의 추대를 받고 사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황제의 어좌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미덕은 당시의 역사배경 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며 무력을 이용해 정권을 찬탈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중국역사에서 반드시 선혈이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야만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진교역(陳橋驛)에서 부지불식간에 황제로 옹립된 조광윤은 이 돌발적 사태의 결과에 대해 자신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진교병변의 성격을 ‘우연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반드시 원인이 있는 법이다. 그 원인은 황제는 어리고 나라가 혼란스러워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덕과 재능을 겸비한 조광윤이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다년간 군대를 이끌면서 쌓은 인덕과 명망이 ‘필연성’을 낳게 하여 적당한 시기에 우발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교차되어 생긴 역사적 선택이다.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한 진교병변은 바로 후주(後周)의 성립과정에서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책사 중의 책사인 조보(趙普)와 그의 동생 조광의(趙光義)는 역사적 병변사례를 검토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진교병변이 모델로 삼은 것은 바로 자신들이 무너뜨리려는 후주의 태조 곽위가 후한의 은제 유승우에게 반기를 든 ‘전주병변(澶州兵變)’이었다.

10년 전 950년 말 곽위가 3명의 절도사들의 반란을 모두 평정하자, 곽위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은제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곽위와 시영이 변경성을 공격해 유승우가 죽고, 변경에 입성한 곽위는 유승우의 어린 아들 유빈(劉贇)을 황위에 앉히고 이태후(李太后)가 섭정토록 하려던 찰나에 거란의 침입소식을 들은 이태후가 유빈의 즉위식을 미루고 곽위에게 즉각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곽위의 부대가 변경을 떠나 북상하던 중 전주(澶州)에 이르렀을 때 장병들이 소동을 일으키고는 황기(黃旗)를 찢어 곽위의 몸에 두르고 황제로 추대했다. 전주에서 회군하여 변경으로 돌아온 후, 951년 1월초 유빈으로부터 황위를 선양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고 국호를 ‘후주(後周)’로 했던 것이다. 이때 조광윤도 군에 입대한 직후 전주병변에 참여했다.

전주병변의 ‘황기가신(黃旗加身)’이 진교병변의 ‘황포가신(黃袍加身)’의 모델이 되었다. 다만 다른 점은 곽위 당시에는 금군 장군들이 상황이 도래되자 불시에 일으킨 병변이었다면, 진교병변은 세종이 죽은 이후 조보와 조광의 등 핵심 참모들이 반년의 세월을 두고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점이다. 그 외에 곽위 당시는 전쟁을 통해 후한의 은제가 죽고 유빈의 자리를 빼앗아 황위에 등극했다면, 조광윤은 피를 흘리지 않고 공제로부터 황위를 선양 받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