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회남(淮南)절도사 이중진(李重進)의 반란 평정
『손자병법』의 「용간편(用間篇)」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현명한 군주나 장군이 싸우기만 하면 적을 이길 수 있고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사전에 적에 대한 파악을 잘했기 때문이다. 사전에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귀신에게 기도하거나 길흉을 예측하거나 밤하늘의 별의 운행을 살펴보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후주의 회남(淮南)절도사였던 이중진(李重進)도 이균과 연합해 송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했다. 그들은 남북으로 호응해 이균은 서북의 노주(潞州)에서, 이중진은 동남의 양주(揚州)에서 반기를 들어 송나라의 앞뒤를 협공하려 했다. 이러한 부득이한 상황에서 조광윤은 먼저 이중진을 스스로 미루도록 계책(計策)을 써서 송군이 뒷걱정 없이 이균을 정벌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했다.
이중진은 본래 후주의 개국공신이었고, 또 태조 곽위 누이의 아들이었다. 952년 1월, 그는 무신군절도사를 겸했고, 세종시기에는 시위마보군도지휘사를 겸했다. 그러나 이중진은 평소 교만했다. 그에게 있어서 조광윤은 일개 수하의 병졸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중진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조광윤은 중급 장령에 불과하여 지위로 봤을 때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 후기에 이중진과 조광윤이 함께 금군을 장악하고 있을 때 조광윤의 자질이나 능력이 그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그는 불안에 싸였다. 후주의 마지막 황제가 즉위할 때 조광윤은 전전도점검으로서 군 최고사령관이었다. 여전히 시위마보군도지휘사였던 이중진은 비록 회남절도사로 부임했지만 조광윤이 계속 중용되자 질투심이 생겼다. 남을 진정으로 대하는 조광윤은 그에 대해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회남절도사로 있게 하고 양주에 주둔하도록 했다. 다만 이중진이 경성(京城)수비사령관인 시위마보군도지휘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직책만을 해임했던 것이다.
조광윤이 황제가 된 이후 이중진은 자못 서먹서먹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경성에서 천리 떨어진 양주에 있는 그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어서 겉으로는 조광윤에게 복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대책을 강구했다. 심사숙고한 이중진은 먼저 경성에 돌아간 다음 다시 타산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윤에게 입궁할 것을 청했다.
문제를 빈틈없이 고려하는 조광윤은 그의 입궁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회남절도사가 주둔하고 있는 양주는 남당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에 한림학사 이방(李昉)에게 조서를 기초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원수(元帥)인 황제와 고굉지신(股肱之臣)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여전히 일심동체이니라.”는 이유로 이중진의 입궁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경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 계략이 먹혀들지 않자 그는 이균과 야합해 송나라에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