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교역에서 회군하여 별다른 충돌 없이 경성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먼저 객성사(客省使) 반미(潘美)를 급파해 조정대신들에게 병변사실을 통보하고 협조를 구하도록 명했다. 또 경성 안에서 내응하고 있던 석수신, 왕심기 등에게 사람을 보내 함부로 사람을 살육하지 못하도록 했다.
반미가 병변사실을 알리려 입궁했을 때, 재상과 문무대신들은 아직 아침 조회를 하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병변소식에 경악과 후회가 교차한 재상 범질이 왕부의 손을 잡고 이를 깨물며 말했다. 이때 범질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조장군(趙將軍)을 파견하는데 너무 소홀했소이다! 너무 성급하게 대처했어요! 이런 사변이 일어나다니, 우리의 죄가 크네!」
범질은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현실이 된 이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문무대신들은 병변소식에 놀라지 않았다. 올 것이 온 것뿐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 조용히 인자(仁者)의 도래를 기다렸다.
6군을 통솔해 경성에 당도한 조광윤은 장병들이 황궁의 명덕문(明德門)으로 안내하려 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고 인화문(仁和門)을 통해 입성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모두 군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자신은 전전도점검 공관으로 갔다.
이때 경성의 수비를 맡은 시위마보군부지휘사 한통(韓通)이 병변소식을 듣고 병마를 이끌고 재빨리 달려 나와 전전도점검공관을 공격해왔지만 좌액문에 매복해 있던 석수신의 병사와 맞닥뜨렸다. 한통의 근위병들이 뿔뿔이 줄행랑을 치자 한통은 별 수 없어 집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전전사의 산원지휘사(散員指揮使) 왕언승(王彦升)이 병사를 이끌고 추격해 그의 집에서 한통을 사살했다. 이것이 이번 병변의 유일한 유혈사건이었다. 한통은 원래 세종으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았던 무장이었다. 병변을 일으킨 조광윤의 입장에서는 그에게 우려가 되는 3명의 도전자 중 가장 가까이 있는 한 명을 가장 먼저 제거한 셈이었다. 그 3명은 한통 이외에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반기를 든 절도사 이균과 이중진이었다.
조광윤은 황제로 등극한 후 한통의 죽음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특별히 중서(中書)로 추증해 그의 충효를 치하했다. 한통을 사살한 왕언승에 대해서는 함부로 죽인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려 했다. 여러 신하들이 건국 초기에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변호하며 극구 사면을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노기가 풀리지 않아 왕언승에게 종신토록 대장군의 직분을 가질 수 없다는 특명을 내렸다.
얼핏 봤을 때는 사리에 잘 맞지 않는 처사 같으나 사실상은 조광윤의 정치가로서의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광윤은 실로 ‘군사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