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2)2. 배주석절권(杯酒釋節權): ‘한 잔의 술’로 절도사직 박탈 황권과 관련된 중대문제에 관해서는 황제의 자질에 따라 처리하는 방식이 각기 달랐다. 절도사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문제를 처리할 때, 조광윤은 넓은 아량과 진정어린 마음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명백히 언급했다. 968년(태조9) 10월, 조광윤은 후원에서 연회를 열고 후주 때부터 절도사직을 오래 역임한 몇 명의 번진 절도사들을 초대했다. 이 연회에 참석한 절도사는 봉상(鳳翔)절도사 왕언초(王彦超), 안원군(安遠軍)절도사 무행덕(武行德), 호국군(護國軍)절도사 곽종의(郭從義), 정국군(定國軍)절도사 백중빈(白重贇), 보대군(保大軍)절도사 양정장(楊廷璋) 등이었다. 이들은 후주시기부터 송나라에 걸쳐 계속 나라를 위해 큰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서로 기뻐했고 옛날의 공적과 노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얕은 수를 피울 줄 모르고 일을 졸렬하게 처리하지 않는 조광윤은 태연자약하게 그리고 솔직히 말했다. 「여러 분들의 이야기는 다 지나간 옛일들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맙시다. 경(卿)들은 모두 나라의 원로들이고 오랫동안 번진에 있었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1)조광윤은 개국공신들을 상대로 엄청난 거래를 했던 것이다. 는 경제적 혜택을 조건으로 내걸고 그들의 병권을 요구하였다. 황제와 개국공신들은 ‘부귀영화’와 ‘반란 방비’라는 ‘정치무역(政治貿易)’을 놓고 너무나도 쉽게 타협하였다. 조광윤은 이렇게 해서 황권(皇權)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금군 고위 장군들의 지휘권을 손쉽게 해제할 수 있었다.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술잔으로 병권을 풀었다”는 뜻으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고 하였다. 조광윤은 이러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다. 여러 장군들의 병권을 해제시키는 것은 본래 가장 어렵고 큰 사안이었으나, 그는 쉽고 작은 데서부터 착수하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절도사 권한 축소를 위한 조보의 헌책(獻策) 어느 날 송태조 조광윤은 조보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천하는 당(唐)나라 이래 수 십 년간 제왕의 성(姓)이 여러 번 바뀌고 전쟁이 그치지 않아 민생이 도탄에 빠진 원인은 무엇이오?」 이에 조보가 아뢰었다. 「당나라 이래 전쟁이 빈번하고 나라가 불안정했던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제4절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한 잔의 술로 병권을 풀다 (01)조광윤은 “어려운 일은 쉬운 데로부터 착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어려운 일’인 병권을 쉽게 장악함으로써, 그 다음 해결해야 할 ‘쉬운 일’을 위한 조건을 마련했다. 961년(태조2) 7월 어느 날 저녁 조광윤은 황궁에서 연회를 열고 그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운 석수신(石守信), 모용연소(慕容延钊), 고회덕(高懷德), 왕심기(王審琦), 한영곤(韓令坤), 장영택(張令鐸) 등 금군의 고위장군들을 초대했다. 술잔이 세 순배나 돌고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해 흥이 무르익을 무렵 조광윤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만일, 경(卿)들이 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황제가 되었겠소? 경(卿)들의 공로와 은혜를 잊을 수가 없소. 이제 황제가 된 이상은 진정한 황제가 되고 싶소. 그런데 황제란 참 어려운 자리로구먼... 황제가 된 이후부터 나는 하루도 발 뻗고 편히 잠을 못 자봤소... 매사에 즐거움이 없고, 차라리 절도사 시절이 그리울 지경이오!」 석수신 등 무장들은 이 말을 듣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폐하께서 두 이씨(李氏)의 반란을 평정하여 이제 온 나라가 태평성대를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14) ▶ 많은 죄를 범한 저주(滁州)방어사 이한초(李漢超)를 용서하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한초(李漢超)를 관남순검사(關南巡檢使)로 임명하여 거란의 침공을 막도록 했다. 이어서 저주(滁州)에서 부과세가 많이 나오므로 그를 저주방어사(滁州防禦使)로 임명하고 저주의 세금으로 전쟁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경비로 충당하게 했다. 무장 출신 이한초는 많은 범법행위를 저질렀다. 그의 만행이 계속되자 관남(關南)의 백성들은 경성(京城)에 올라가 “그가 천민의 돈을 빌려 쓰고는 갚지 않으며, 백성의 부녀자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다.”는 죄를 나열하면서 고발했다. 송태조는 백성들을 편전에 불러들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해 주면서 천천히 물었다. 「이한초가 관남에 들어간 후 거란이 침입한 적이 있었소?」 백성들이 아뢰었다. 「없었사옵니다.」 송태조가 말했다. 「지난날 거란이 침입했을 때 국경수비대가 그것을 막지 못해 하북(河北)의 백성들은 해마다 거란인들에게 강탈당했었소. 그때 여러분들은 재산과 부녀자들을 보호할 수 있었소? 오늘 이한초가 나쁜 짓을 좀 했다 해도 거란인들에게 비교하겠소?」 그는 또 딸을 빼앗겼다고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13) 5.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 오장하(五丈河) 준설감독 윤훈(尹勛)을 용서하다 963년(태조4) 3월, 조광윤은 윤훈(尹勛)에게 명하여 오장하(五丈河) 준설 인부들을 감독하게 했다. 윤훈은 책임감이 강한 자였으나 지나치게 인부들을 닦달했기 때문에 진류(陳留)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한밤중에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병졸들을 이끌고 가서 도망갔던 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그리고는 주모자 10명은 참수하고 70여명은 귀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다. 윤훈의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사회의 공분을 일으켰고, 많은 인부들이 경성(京城)에 올라와 윤훈을 엄히 처벌해 줄 것을 호소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이도(李濤)는 분노를 참지 못해 아픈 몸을 끌고 조광윤을 찾아가 백성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훈을 참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조광윤은 이도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독려해 주었다. 이는 그의 의견을 수락하는 것을 뜻하므로 일을 저지른 자를 가중 처벌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이도의 신임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신임을 좀 잃더라도 사람을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11) ▶ 후당(後唐) 장종(莊宗)이 오래가지 못한 이유 송태조 조광윤은 군을 엄격히 다스렸기 때문에 군에는 교만하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이 없어졌다. 조광윤은 군법을 가차 없이 집행하면서도 결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한 예를 들면, 어느 날 조광윤은 대신 이승진(李承進)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30년 전에 후당 조정의 관리였었다. 조광윤이 그에게 물었다. 「후당의 장종 이존욱(李存勖)은 용맹하여 중원(中原)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시운이 오래가지 못한 (4년간 재위) 원인은 무엇이오?」 이승진이 아뢰었다. 「장종은 사냥을 좋아했고 또 병사들에게 너무 관용을 베풀었지요. 매번 근교를 순시하러 나갈 때마다 금군의 호위병졸이 꼭 말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서 “저희들이 추위에 떨고 있사오니 구제해 주옵소서!” 하고 애원했습니다. 장종은 즉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지요.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군기가 실종되고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은상을 무절제하게 베풀어 권위와 명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조광윤이 무릎을 치면서 탄식했다. 「20년 동안 황하 양안에서 전쟁을 벌여 어렵게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10)병법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용병술이 뛰어난 자는 스스로 필승의 법도를 지키기 때문에 승패의 주도권을 확고히 잡을 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송태조 조광윤은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나 전쟁을 지휘함에 있어서나 병법을 깊이 터득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일찍이 엄한 군법을 정해 놓았다. 「적을 물리치는 데서 공을 세운 병사일지라도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가옥에 불 지르고 재물을 약탈한 자는 참수한다. 민가의 부녀를 겁탈했거나 군영에 끌고 온 자는 참수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적병을 함부로 죽인 자는 참수한다. 재물을 탐닉하여 축적하고 전장에 나가는 것을 회피한 자는 참수한다.」 전쟁에서의 군법을 명백히 수립하기 위해 조광윤은 “전쟁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매우 엄격한 군법 조례를 제정하여 에누리 없이 집행해 나갔다. 그 예로 후촉과의 전쟁에서 왕전빈(王全斌)의 한 유망한 장교가 부녀자의 유두(乳頭)를 도려내고 참혹하게 죽였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그 자를 불러들여 참수했다. 가까운 신하들이 사정을 하고 구명하려 했으나 조광윤은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9) 4. 엄한 군법(軍法) 집행으로 군기(軍紀) 확립 송태조 조광윤은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 군법을 엄격히 집행하고 군을 철저히 관리했다. 이것은 그가 백전백승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결이었다. 후주의 장군으로 있을 때 그는 군법을 엄격히 집행했다. 남당의 이경달과 싸웠던 육합진(六合鎭)전투에서 일부 병졸들이 전력투구해 싸우지 않자 그는 독전하는 척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그런 병졸들이 쓰고 있는 가죽투구를 검으로 살짝 찔러 표시를 해놓았다. 전투가 끝난 후 병사들을 사열할 때 투구에 표시가 있는 병졸 수십 명을 군법에 따라 참수했다. 이후부터 그가 통솔하는 병사들은 전력투구하여 싸우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부대의 전투력은 갈수록 강대해졌고 당시에 온 천하에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군을 다스리고 정비함에 있어서 엄격한 군율을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오대(五代)시기 이래 만연해온 병사가 횡포를 부리고 장군을 협박하며 아랫사람의 위세가 윗사람을 능가하는 악습을 제거하기 위하여 친히 군법을 제정했다. 「군부의 도지휘사가 출정할 때 각급 장병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야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8)965년(태조6), 후촉을 평정한 후 조광윤은 또다시 조령을 반포했다. 「용맹한 자들을 선발하여 명부를 만들고 도지휘사에 보내 금군의 공백을 메우도록 한다. 건장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각 지방에 본보기로 보내도록 한다. 또 나무지렛대를 만들어 지방 주둔군에 보내주며, 장군, 도감 등에게 위임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잘 훈련된 병사들을 선발하여 도지휘사에 보내주도록 한다.」 이러한 병사 선발방법은 그가 직업군인 출신으로서 용병술에 조예가 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창시한 이러한 병사선발 방법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것은 “큰일은 작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지혜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밖에 조광윤은 병사선발 과정에도 진지하게 관여했다. 각지에서 병사를 선발해 중앙에 보내오면, 친히 훈련장에 나가 훈련장면을 시찰했다. 강무전(講武殿)에서 친히 1만여 명을 선발하여 각각 마군효웅군(馬軍驍雄軍)과 보군웅무군(步軍雄武軍)을 편성하여 시위사(侍衛司)에 귀속시켰다. 어느 날 그는 황궁 뒤뜰에서 전전사의 훈련을 친히 검열한 적이 있었는데 무예가 뛰어나지 않은 300여명을 색출해 모두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07)3. 우수 병력 양성으로 정예부대를 만들다 송태조 조광윤은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 항상 우수한 병력을 양성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후주의 장군으로 있을 때나 황제가 된 후에나 그는 군대를 정비할 때 언제나 수적 우세를 추구하지 않고 개개인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러므로 그가 통솔했던 후주군과 후일 재건한 송나라의 군은 모두 전투력이 뛰어난 정예부대였다. 조광윤은 송나라를 세운 그 이듬해(961년) 군에 대한 감원 조령을 내렸다. 「전전시위사(殿前侍衛司)와 각주의 관리들은 군부대를 사열하여 용감하고 건장한 자는 승급을 시키고, 노약자나 겁쟁이들은 제대시키며, 남아도는 인원은 제대시키도록 한다.」 송태조 조광윤은 불합격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제대시키거나 나라에서 책임지고 일자리를 배치해주도록 할지언정 그들을 군에 남겨 부대의 전투력에 손상을 끼치려 하지 않았다. 또 963년(태조4) 형남과 호남을 평정한 후 이 두 지역의 군대는 자연히 송나라에 귀속되었지만 “이 귀속된 군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다. 병법에서 말했듯이, 포로들을 우대하고 의식주를 제공해야 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