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수 병력 양성으로 정예부대를 만들다
송태조 조광윤은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 항상 우수한 병력을 양성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후주의 장군으로 있을 때나 황제가 된 후에나 그는 군대를 정비할 때 언제나 수적 우세를 추구하지 않고 개개인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러므로 그가 통솔했던 후주군과 후일 재건한 송나라의 군은 모두 전투력이 뛰어난 정예부대였다.
조광윤은 송나라를 세운 그 이듬해(961년) 군에 대한 감원 조령을 내렸다.
「전전시위사(殿前侍衛司)와 각주의 관리들은 군부대를 사열하여 용감하고 건장한 자는 승급을 시키고, 노약자나 겁쟁이들은 제대시키며, 남아도는 인원은 제대시키도록 한다.」
송태조 조광윤은 불합격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제대시키거나 나라에서 책임지고 일자리를 배치해주도록 할지언정 그들을 군에 남겨 부대의 전투력에 손상을 끼치려 하지 않았다.
또 963년(태조4) 형남과 호남을 평정한 후 이 두 지역의 군대는 자연히 송나라에 귀속되었지만 “이 귀속된 군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다. 병법에서 말했듯이, 포로들을 우대하고 의식주를 제공해야 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만일 이 두 지역의 부대를 전부 편입시킨다면 재정부담이 커지고 군대의 자질도 보장하기 어려웠다. 이 군대가 중임을 맡을 수 있는지, 우대하고 의식주를 제공해야할 가치가 있는지가 의문스러웠던 것이다.
조광윤은 형남, 호남 평정 후 군의 정예화를 위한 조령(詔令)을 내렸다.
「평정한 두 나라의 군대를 합병하면 따로 군량 등 재정을 편성해야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은 자가 있으면 병적을 해제해 주고 농토를 배정해 주도록 하라.」
그리하여 정예병력으로 이루어진 송군(宋軍)은 전투력이 강화되어 이후에 후촉, 남한, 북한, 남당으로 출정하여 통일전쟁을 진행하기 위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송태조는 또 조령을 내려 수천 명에 달하는 북한 포로병을 농촌에 돌려보내면서 나라의 도움을 받게 하고 각지로 분산시켰다. 또 양주(洋州)의 의용군 8백 명도 농촌으로 돌려보냈다.
송태조 조광윤은 또 합병한 군부대 중에서 우수하고 건장한 병사들을 선택하여 송군에 편입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후촉 평정 후 120명을 선발하여 전전사 내에 ‘천반내전직(川班內殿直)’을 조직했고, 남당에서 투항한 병사들 중 1,390명은 금군에 편입시켰으며, 북한에서 투항한 260명의 병사들로는 ‘효순지휘(效順指揮)’를 편성했다. 이리하여 송군은 더욱 강대해졌다. 아울러 금군과 지방부대에 대해서도 약자를 도태하고 강자로 충당하는 조치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