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5년(태조6), 후촉을 평정한 후 조광윤은 또다시 조령을 반포했다.
「용맹한 자들을 선발하여 명부를 만들고 도지휘사에 보내 금군의 공백을 메우도록 한다. 건장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각 지방에 본보기로 보내도록 한다. 또 나무지렛대를 만들어 지방 주둔군에 보내주며, 장군, 도감 등에게 위임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잘 훈련된 병사들을 선발하여 도지휘사에 보내주도록 한다.」
이러한 병사 선발방법은 그가 직업군인 출신으로서 용병술에 조예가 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창시한 이러한 병사선발 방법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것은 “큰일은 작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지혜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밖에 조광윤은 병사선발 과정에도 진지하게 관여했다. 각지에서 병사를 선발해 중앙에 보내오면, 친히 훈련장에 나가 훈련장면을 시찰했다.
강무전(講武殿)에서 친히 1만여 명을 선발하여 각각 마군효웅군(馬軍驍雄軍)과 보군웅무군(步軍雄武軍)을 편성하여 시위사(侍衛司)에 귀속시켰다.
어느 날 그는 황궁 뒤뜰에서 전전사의 훈련을 친히 검열한 적이 있었는데 무예가 뛰어나지 않은 300여명을 색출해 모두 다른 직에 종사하도록 하거나 전전사에서 퇴출시켰다. 조광윤은 이와 같이 세심하고 진지하게 병졸들을 선발하여, 힘으로 싸워야 하는 전쟁시대에 걸맞게 군대의 기동성과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키워나갔다.
따라서 각지에서 선발한 날래고 용맹한 병사들이 변경(汴京)에 집결됨으로써, 중앙의 병력이 지방보다 강해지고 위기대처 능력도 크게 강화되어 중앙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