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도가(道家)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위방본’ 사상 (01) ‘백성이 나라의 기틀’이라고 여기는 민위방본사상(民爲邦本思想)은 원래 맹자(孟子)가 주장한 학설로서“나라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며,토지는 그다음이며,군왕은 가장 중하지 않다.민심을 얻어야만 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조광윤은 비록 봉건군주제도 하의 제왕(帝王)이었지만,백성은 물이며 군주는 배라고 생각하여“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백성을 중히 여기며,언제나 백성의 편에 서서 모든 정책을 구상하고 실천하였다.그는 실로 이리떼와도 같은 탐관오리들로부터 양떼 같은 백성을 지키는 목자(牧者)였다. 1. 새로운 왕조에는 새로운 정치 송태조 조광윤은 즉위 초기에 선행으로 다스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원칙 아래 후주의 옛 신하들을 그대로 유임시킴으로써 되도록 변동사항이 없도록 했다. 그러나 평화적 변화를 도모한다 해도 이전 왕조의 것을 모두 포용한 것은 아니었다. 전 왕조에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해도 새 정권의 정치이념과 통치시스템에 완전히 적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 왕조의 관리들이 무절제하게 백성들로부터
제6절 중앙행정기구를 ‘상호통제시스템’으로 개편 (03)경력이 쌓이고 부단히 승진한다 해도 실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중앙의 임명과 파견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앙은 전국의 모든 주요 관직의 임명과 이동, 승진을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임관제도가 실시된 이후 송나라의 관리들은 상서(尙書)가 된다 해도 지주(知州)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리하여 관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는 이익을 향유할 수 있으나 장기간 권력을 장악하거나 세습하지는 못했다. 조광윤은 새로 통일한 지역의 관리들을 그대로 옛 관직에 두고 다만 권지(權知)를 파견했다. 송태조는 집정하면서 새로운 토지와 백성을 얻었는데 일체 조정과 알력이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관리를 잘 임용하고 옛 관리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 화목하게 대해준 결과였던 것이다. 조광윤은 ‘직권분리(職權分離)’제도를 시행하면서 대부분 관리들이 ‘전각(殿閣)’에서 임직하게 하고, 수시로 각처로 파견하여 실권을 행사하게 하며 구체적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여기서 ‘전각’이란 정부 안에 설치하는 ‘고급 인재 풀(pool)’로서, 직위(職位)와 직무(職務)는 부여되지 않지만 일정한
제6절 중앙행정기구를 ‘상호통제시스템’으로 개편 (02)삼사사(三司使)란 재정(財政)을 주관하는 염철사(鹽鐵司), 탁지사(度支司), 호부사(戶部司)를 가리킨다. 염철사는 공상수입과 병기제조를 관장하고, 탁지사는 재정수입과 조운(漕運)을 관장하며, 호부사는 호구, 부과세, 정부의 전매(專賣) 등 사무를 관장했다. 삼사사의 책임자는 ‘숫자를 따지는 재상’이란 뜻으로 ‘계상(計相)’이라 불렀는데, 실제로는 당나라의 상서성(尙書省)에 해당하고 지위는 추밀사나 동중서문하평장사보다 낮아 중앙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것은 상호간에 견제하고, 직무분장이 뚜렷하지 못했던 수당(隋唐)시기의 삼성제(三省制)에 비해 훨씬 향상된 조치였다. 그 결과 업무의 분장과 직책이 분명해지고 관리체계가 질서 있게 구축됨으로써, 송나라는 오대십국의 난세 속에서 우뚝 일어설 수 있었다. 2. 중앙행정기능 개편: 실권자와 감독자 간 상호견제시스템 송태조 조광윤의 관리임명 원칙은 ‘관(官)’과 ‘직(職)’을 달리하고 ‘명(名)’과 ‘실(實)’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관리(官吏)제도를 관(官), 직(職), 임명(任命) 등 3종으로 나눴는데 ‘관(官)’은 다만 ‘우녹질
제6절 중앙행정기구를 ‘상호통제시스템’으로 개편 (01) 1. 중앙행정기구의 기능을 분할, 상호견제케 하다 국가라는 방대한 조직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체계적인 정부기구가 있어야 한다. 송태조 조광윤이 후주의 옛 관리들에게 계속 같은 직책을 맡게 하는 것은 행정의 능률과 효과를 제고하고자 하는 그의 시정(施政) 요구에 맞지 않으며 그러한 정부조직은 결코 완벽한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조광윤은 부득이 후주의 정부기구에 대해 일대 개혁을 실시하게 되었다.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바로 혼란한 신하들의 직제상 위치를 바로 잡아주고 대신들이 수행할 직책을 분명히 정해 주었다. 중서(中書)는 국가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고, 추밀원(樞密院)은 군사를 관리하게 했으며, 삼사(三司)는 국가재정을 주관하게 했다. 이 3개 기구의 장관은 모두 재상(宰相)으로 구성했다. 그는 당나라의 삼성제(三省制)를 회복해 정부기구를 설치했으나, 그 직책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과거 삼성(三省)이 하나의 통합기구로 되어있던 것을 분할하여 각 성(省)으로 독립시켰다. 건국 초기에 조광윤은 중서성은 국가의 행정사무만 관장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면서 중서성의 영도권을 강화했다. 재상(宰相)인 동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8)‘안사의 난(安史之亂)’ 후 당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번진을 두려워했고 날로 강대해지는 그들을 억제할 힘도 방법도 없었다. 결국 번진의 할거정권이 형성되어 제각기 국정을 도모하고 서로 토벌을 감행하는 바람에 당나라는 곧 망하게 되었고, 결국 오대십국(五代十國)이란 혼란한 국면이 형성되었다. 오대(五代)시기의 각 왕조 역시 번진세력을 두려워했고 기껏해야 가끔 번진에 대한 제한적 타격을 가했을 뿐이었다.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의 세종은 번진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을 베풀었다. 양양(襄陽)절도사 안심기(安審琦)가 조정에 왔을 때 세종은 기뻐하여 친히 그의 숙소를 방문했고 깍듯이 대해 주었는데, 이는 그가 마음속으로 번진세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후주의 향훈(向訓)이 허주(許州)절도사로 있을 때 허주의 백성들은 그의 많은 부정행위를 세종에게 고발했다. 그러나 그는 진상을 조사해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고소한 사람을 향훈에게 넘겨 결국은 강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 이균은 노주절도사로 8년 동안 있었는데, 그는 독립왕국으로 자처하고 백성들을 압박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질렀다. 그러나 세종은 그에 대해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7)6. 평정(平定) 후 편입지역에 중앙에서 문관 통판(通判) 파견 송태조 조광윤은 형남과 호남을 통일한 후 새 지역에 원래 관리들을 유임시켰기 때문에,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건이 성숙됨에 따라 각 주에 통판(通判)을 두기 시작했다. ‘통판’이란 공동으로 정무를 관장한다는 뜻으로 주정부(州政府) 장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정부의 행정사무와 관리를 감찰하는 실권을 가지고 있어 ‘감주(監州)’라고도 불렀다. 주정부의 민정, 재정, 호구, 세금, 사법 관련 주요 문서들은 반드시 지주와 통판의 '연명(連名) 서명'이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큰 주에는 2명의 통판을 두었고, 인구가 1만 명 미만인 주에는 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주가 무관일 경우에는 작은 주이더라도 통판을 두었다. 지주와 통판은 상호견제함으로써 중앙집권에 대한 지방장관의 전횡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로써 송태조 조광윤은 온화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중앙집권을 단계적으로 실현했다. 이러한 성과는 인덕이 없는 황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힘든 일이다. 7. 중앙과 지방은 서로 예우하고 의존하며 견제케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6)5. 소황제적(小皇帝的) 절도사 부언경(符彦卿)을 압박하다 장기간 위주(魏州)지역을 지키고 있는 천웅군(天雄軍)절도사 부언경(符彦卿)은 조광의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며 부정을 저질렀으며 관할지역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태조는 슬기롭고 능력 있는 관리들을 위주(魏州) 산하 현의 지현(知縣)으로 파견했다. 대리(大理) 정해서(正奚嶼)는 관도현(館陶縣), 감찰어사(監察御使) 왕호(王祜)는 위현(魏縣), 양응몽(楊應夢)은 영제현(永濟縣)의 지현으로 부임시켰다. 조정의 주요 인사들을 위주 산하 4개 현의 지현으로 파견한 것은 그 의도가 명백했다. 그 지역을 맡고 있는 절도사 부언경을 간접적으로 통제하고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후에 조광윤은 또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주위(周渭)를 영제현(永濟縣) 지현으로 부임시켰다. 주위가 부임한 후 한 도적이 사람을 해치고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관리를 파견하여 도적을 체포하고 죄행을 공포한 후 즉시 참수했다. 그는 먼저 위주절도사 부언경에게 보고해야 하는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주위(周渭)는 중앙에서 파견한 조정대신으로서 지현에 부임했기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5)4. 절도사 권한 및 기능 축소: ‘지군제(支郡制)’ 폐지 송나라 초기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리제도는 여전히 후주의 제도를 답습하고 있었으므로 절도사는 여전히 지방의 군정(軍政)을 관장하고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절도사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지군제(支郡制)’를 점진적으로 폐지했다. ‘지군(支郡)’이란 절도사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 외에 추가로 관할하는 주(州)와 군(郡)을 가리킨다.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시기에 한 절도사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주의 정무를 관리하는 외에 또 부근에 있는 주나 군의 정무도 관장했다. 예컨대, 양주(揚州)의 산남동도(山南東道)절도사는 양주 외에 균(均), 방(房), 복(復) 3주(州)도 겸하여 관리했다. 비록 이 3개 주에는 각기 방어사(防禦使), 단련사(團練使), 자사(刺史)가 주의 정무를 관장하고 있으나, 반드시 절도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기 때문에 3개 주는 행정적으로 양주의 지군(支郡)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광윤은 전국의 절도사의 권한을 단번에 회수하거나 없애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절도사의 ‘지군(支郡)’을 폐지했다. 형남과 호남 정권을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4)송태조 조광윤이 절도사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정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이 관리들은 ‘권지주사(權知主事)’라 불렀고 약칭은 ‘지주(知州)’이다. ‘권지(權知)’란 지주(知州)의 권한을 행사하고 임시 관리한다는 뜻으로 무인들이 독점했던 절도사직이 세습되었던 것과는 달리 권지의 임기는 3년이었다. 이러한 관리임용제도는 아주 절묘한 점이 있었다. ‘권지’라는 관직은 임기직이지만 ‘지(知)’란 주관한다는 뜻으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사실상 주정부(州政府)의 1인자로서 군사, 행정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원래에 있던 관리들은 직무는 있으나 피지배적인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정부에도 ‘주사(主事)’라는 직급이 있는데 이는 6급의 실무 공무원을 의미하며 ‘직급’을 표시할 뿐 ‘직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사(主事)’의 어원은 아마도 송태조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의 ‘주사(主事)’는 절도사를 대신하는 막강한 지방행정장관을 가리키는 것이 크게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말 고종과 순종 당시 ‘대한제국’의 중앙행정기관에는 ‘주사(主事)’가 있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3)3. 무인(武人) 절도사가 공석된 곳부터 문관(文官) 지주(知州) 파견 건국 초부터 조광윤은 번진의 지배권에 대해 개혁을 시작했다. 당시 주(州), 진(鎭)의 군정대권은 절도사 수중에 있었다. 조광윤이 황제로 등극한지 두 달이 지날 무렵 노주의 소의군절도사 이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가 친정하여 6월 중순경 토벌을 마쳤다. 바로 그 무렵 960년 7월에 진주(鎭州)의 성덕(成德)절도사 곽숭(郭崇)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자 조광윤은 그를 조정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선휘남원사(宣徽南元使) 구거윤(咎居潤)을 권지진주(權知鎭州)로 임명함으로써, 처음으로 문관이 이름은 ‘지주(知州)’로 바뀌었지만 사실상 절도사직을 맡고 지방의 군정(軍政)을 관장하게 했다. 이때부터 곽숭은 조정에서 ‘직권분리(職權分離)’제도 하에서의 ‘절도사’라는 유명무실한 직을 갖게 되었고 황제는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구거윤은 여러 지역의 지주(知州)와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 등 요직을 역임한 전형적인 문관이었다. 이번에 조광윤이 그를 권지진주로 임명하고 군정대권을 장악하게 한 것은 ‘절도사직에 문관을 등용한 첫 조치’이며, 단계적으로 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