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앙행정기구의 기능을 분할, 상호견제케 하다
국가라는 방대한 조직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체계적인 정부기구가 있어야 한다. 송태조 조광윤이 후주의 옛 관리들에게 계속 같은 직책을 맡게 하는 것은 행정의 능률과 효과를 제고하고자 하는 그의 시정(施政) 요구에 맞지 않으며 그러한 정부조직은 결코 완벽한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조광윤은 부득이 후주의 정부기구에 대해 일대 개혁을 실시하게 되었다.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바로 혼란한 신하들의 직제상 위치를 바로 잡아주고 대신들이 수행할 직책을 분명히 정해 주었다.
중서(中書)는 국가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고, 추밀원(樞密院)은 군사를 관리하게 했으며, 삼사(三司)는 국가재정을 주관하게 했다. 이 3개 기구의 장관은 모두 재상(宰相)으로 구성했다.
그는 당나라의 삼성제(三省制)를 회복해 정부기구를 설치했으나, 그 직책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과거 삼성(三省)이 하나의 통합기구로 되어있던 것을 분할하여 각 성(省)으로 독립시켰다. 건국 초기에 조광윤은 중서성은 국가의 행정사무만 관장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면서 중서성의 영도권을 강화했다.
재상(宰相)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외에 따로 몇 명의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두어 업무를 분담하도록 했으며 그 지위는 부재상(副宰相)에 상당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인지하(一人之下)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재상을 10년 이상 역임했던 조보의 전횡을 견제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당나라의 추밀사는 환관이 관장하던 직책으로서 군사에 대해서만 관여했다.
후에 환관의 세력이 커지자 추밀사의 직분으로 조정의 정사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당소종(唐昭宗) 때에 이르러 주전충의 힘을 빌려 나라를 어지럽히는 환관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야 문관이 추밀사를 맡게 되었다. 오대(五代)시기의 추밀사는 파병권(派兵權)을 장악하고 재상의 지휘를 받지 않아 재상보다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송나라 초기에 조광윤은 많은 역사적 교훈을 거울삼아 추밀사를 추밀원장관으로 개칭하고, 중서성의 동평장사(同平章事)와 함께 ‘재집(宰執)’이라 하여 소위 ‘재상그룹’을 형성하고, 공동으로 군사와 국정의 중요사안을 책임지도록 했다. 그리고 조광윤은 과거에 환관과 무관이 주로 맡았던 추밀사에 문관을 등용했고, 군사를 관장하는 추밀원을 재상직할의 중서성에서 분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