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농민을 위한 각종 정책 개발 (01)옛날부터 ‘말 타고 꽃구경 하듯이’ 모양새만 내면서 가식적으로 농민들의 고통을 보살피는 척 했던 제왕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황은(皇恩)을 조금 베풀기라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까봐 전전긍긍했다. 조광윤은 이러한 가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는 황제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꾸밈이 없이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본심은 결코 꾸며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치들을 취했다. 조광윤은 다방면으로 민생을 파악하기 위해 외지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신하들은 반드시 백성의 어려움과 이해관계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토록 명했다. 백성의 상황을 똑똑히 알아야 조정에서 위업을 쌓을 수 있고 제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사업시행에 온갖 힘을 쏟아 부으면서 보다 많은 일을 해내고 실속 있는 일을 하여 민생의 상황을 파악한 기초 위에서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965년(태조6) 8월에 조광윤은 재상, 추밀사, 변경윤(汴京尹), 한림학사 등 조정의 주요 인물들을 불러 연회를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8)민력을 절약하기 위해 조광윤은 관청의 물자수송 문제에 대해서도 ‘애민지책(愛民之策)’을 내놓았다. 송나라시기에 교통수단은 일천년 이전의 하(夏), 상(商), 주(周) 나라 때보다 별로 개선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소나 말이 끌고 사람이 등에 지고 날랐다. 송태조 조광윤은 민력을 아끼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건국 초기에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각 주의 물자수송에 민간 인부들 대신에 모두 군사들을 배치하라.」 그 이듬해에 그는 또다시 조령을 내렸다. 「삼사(三司)가 봄, 겨울에 국경수비군에 보내는 의류와 관청에 공급하는 물자수송 차량은 민간에서 징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 두 조령은 조광윤의 민력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사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군사가 백성을 대신해 물자수송에 참여하면 군대의 전투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뿐더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다. 이러한 처사는 전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968년(태조9)에 각 주에서 국가의 자금과 물자를 조정에 납부할 때, 백성의 배나 마차를 징용해 운송도구로 삼았던 방법에 대해 조광윤은 금지령을 내리고 관청에서 제공하도록 했다. 이것도 백성에게 부담을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7)역사의 교훈을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조광윤은 어릴 때부터 신문열(辛文悅)이라고 하는 스승을 모시고 공부했기 때문에 부역(賦役)에 의해 진나라가 망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역의 징용에 대해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라가 부역을 원활하게 징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조광윤은 경성(京城)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京畿)지역 16개 현의 인구수를 재조사하도록 명했다. 그 결과 변경부(汴京府)에서 집계한 수가 전보다 많아진 것 외에 기타 현(縣)들은 모두 원래보다 인구수가 적어졌다. 이것은 필연코 부역의 배정을 공평하게 하지 못한데서 생긴 문제라고 조광윤은 생각했다. 돈 있고 세력 있는 자들은 관리와 결탁해 부역을 회피하거나 다른 백성에게 돌렸다. 이에 대해 조광윤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각 현(縣)에서 부역을 결정할 때 세력가들은 부역을 회피하게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과중한 부역을 배정한다면 관직을 파면할 것이다.」 그리고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는데 백성을 동원하기 위해, 그는 하남부(河南府), 경동(京東), 하북(河北)의 47개 군부(軍府)와 주에 명령을 내려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6)5. 민력(民力)을 아껴 부역(賦役)을 최소화 송태조 조광윤은 행동으로써 자신이 ‘질박(質朴)하고 자연스러운 통치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에게는 휘황찬란한 이론이 없었다. 전제시대의 제왕이었지만 조광윤은 단순히 백성을 아끼며 사랑하고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소박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실천해나갔다. 국가에서 부역(賦役)을 징용하는 면에서 그는 이전의 황제들보다 더 많은 은덕을 베풀었고 훌륭하게 처리했다. 부역은 통치계층이 강제로 백성에게 무상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힘든 노역이었다. 백성을 아끼는 조광윤은 나라가 부역을 징용하는데 대해 매우 신중하게 결정했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인력을 징용했다. 961년(태조2)에 송나라에서 오장하(五丈河)를 준설할 때 그는 사중(事中) 유재(劉載)에게 인부 3만 명을 동원하라고 명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짐(朕)은 나 자신을 위해 백성을 부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번 준설작업은 변경에서 회하(淮河)를 거쳐 운하(運河)로 진입하는 수송로를 개통해 경성(京城)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역대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아끼지 않고 마구 부역을 징용했다. 그 결과 왕왕 백성의 반란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5)재정수입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광윤은 한동안 금지했던 차엽전매(茶葉專賣)를 회복시키고, 나라가 차엽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964년(태조5) 8월에 변경(汴京), 건안(建安), 한양(漢陽), 기구(蘄口) 등지에 점포를 설치하고 차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965년(태조6) 9월에는 회남전운사(淮南轉運使) 소효(蘇曉)가 회남(淮南)의 기(蘄), 황(黃), 서(舒), 노(盧), 수(壽) 5개 주에 14개 점포를 설치하고 차엽을 전매토록 건의하자 조광윤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 차엽점포들이 개장하자 재원이 끊임없이 확보되었고 회남 5개 주의 차엽점포들에서만 해마다 수입이 백여만 관에 달해 재정수입을 올리는데 크게 한몫을 했다. 아울러 조광윤은 제거차마사(提擧茶馬司)를 설치해 차(茶)와 말(馬)을 교환하는 일을 맡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물론 전쟁에 필요한 말을 충분히 확보하는 군사전략을 충실하게 실행했다. 조광윤은 나라경제를 다스림에 있어서 비록 농업을 기본으로 했으나 이와 같이 잠재력을 발굴하여 여러 면에서 재정수입을 확보했다. 특히 상업에 대해 중시하고 보호조치를 취하며 상업규제에 대한 완화정책을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4)그 다음으로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송태조는 상인들을 괴롭히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령을 내렸다. 조서(詔書)에서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상인들의 물품을 억류해서는 안 되며, 결산을 해야 하는 경우 외에는 그들의 물품상자를 수색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격려하고 상품의 유통을 활성화시키는 조치였다. 또 상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세금규칙을 백성에게 공포하라고 명령했다. 「상업세칙(商業稅則)을 세관문에 게시하여 관리가 마음대로 고치거나 보충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조령은 상인들이 정책과 법을 알게 하고 세금규칙에 따라 납세하게 함으로써, 상인들이 세금규칙을 세세히 모르고 있는 점을 악용하여 세관관리들이 금품을 뜯어 먹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했고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었다. 송나라에서는 호적을 주세대(主世帶)와 객세대(客世帶)로 구분했다. 주세대는 토지를 가지고 있는 5개 등급의 농민이고, 객세대는 토지가 없는 자들로서 수공업자, 작업장주, 소작농, 상인 등이 포함되었다. 객세대에는 주로 상인이 많았다. 그들은 장거리 운송을 통해 매매를 업으로 하여 토지를 떠나 생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3)4. 경제 활성화를 위해 상업을 개방 오대(五代)시기 이래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고 왕조의 교체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대개 왕조의 임금들은 무력으로 자신의 제위를 지키는 것만 알았지 경제를 발전시키는 문제는 안중(眼中)에도 없었다. 후주의 세종이나 후당의 명종과 같이 일부 경제를 중시한 제왕이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논에 수확이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비록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했지만 경제는 별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오대시기에 중국경제는 크게 퇴보하는 현상마저 빚어졌다. 후주의 세종은 경제적 안목이 있는 황제였다. 경제를 발전시켜야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중국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은 크게 물자를 원활히 유통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유통의 매개체인 화폐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장기간 동전(銅錢)을 만들지 않은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훼손하여 식기나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유통되는 동전의 수량은 갈수록 적어졌다. 이에 세종은 동(銅)을 수집하여 화폐를 만드는 전문기구를 설치했다. 다만 조정의 예기(禮器)와 병기(兵器),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2) 2. 변하(汴河) 준설(浚渫) 시 인부들의 고충을 덜어주다 당시 중원(中原)에는 하남(河南)의 영양(榮陽)에서 황하의 강물과 만나 동쪽으로 흐르는 한줄기 강물이 있었다. 이 강은 변경(汴京)과 귀덕(歸德)을 거쳐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안휘성(安徽城) 경내로 흘러들어 숙주(宿州), 영벽(靈璧), 사현(泗縣)을 거쳐 회하(淮河)로 유입되었다. 이 강은 송조(宋朝)시기에 변수(汴水)라고 불렀으며 각 지방에서 변경(汴京)에 공물로 바치는 식량을 실어 나르는 주요한 수로였다. 황하의 강물이 섞인 변수에는 모래 함량이 많았기 때문에 해마다 한 번씩 강바닥을 준설해야 했다. 당시에 변수의 수로를 준설하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었다. 지난 후주시기에 나라에서 수로를 준설할 때 필요한 인부는 각 지방에서 무상으로 제공했고, 그 인부들은 스스로 먹을 식량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이 거대한 공사는 실로 백성의 피와 땀을 강요하는 일이었다.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한 초기에 변수(汴水)는 마침 또 준설해야 할 시기가 닥쳤다. 어떻게 수로의 준설작업을 시행하느냐 하는 것은 새로 수립된 송조정(宋朝廷)이 얼마만큼 백성의 민생고를 해결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1)1. 5일에 한번 씩 황제에게 민심(民心)을 상주토록 하다 송태조 조광윤은 962년(태조3) 2월에 다음과 같이 조령을 내렸다. 「백관(百官)들은 지금부터 5일에 한 번씩 내전기거(內殿起居)를 해야 하며, 차례에 따라 시정(時政)의 득실과 조정의 급선무 또는 억울한 사건, 백성들의 아픔 등에 관한 소견을 발표해야 한다. 현장방문을 통해 들은 것들은 반드시 직접 기록하며 부정에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급한 안건이 있을 경우에는 수시로 ‘합(閤)’에 찾아와 상소문을 내되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조령에서 알 수 있다시피 조광윤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리들에 대한 많은 개혁조치를 취하여 관리들이 법을 어기고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관리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국록을 축내거나 겉으로만 잘하는 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도록 독촉했다. 그는 5일에 한 번씩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내전에서 황제와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모두가 당면 국가정책의 득실에 대해 의견을 내놓고 급선무가 무엇인지, 백성에게 고통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실제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1절 도가(道家)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위방본’ 사상 (02)▶ 열린 정치, 따뜻한 정치 송태조 조광윤은 황위에 오른 후 권좌를 단정히 하고 대전(大殿)의 모든 문들을 다 활짝 열어놓게 했다.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이요. 바르지 못한 것들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오.」 조광윤은 이와 같이 광명정대하고 거리낌 없이 나라를 다스려나갔다. 이러한 조광윤은 바로 공자(孔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상(像)이었다. 요즈음의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도 한 나라의 통치자가 맑고 투명한 정치를 위해 진정한 의미의 ‘열린 정치’를 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송태조 조광윤은 신하를 대함에 있어서 비록 스스로 ‘고왕(孤王)’, ‘과인(寡人)’, ‘불곡(不谷)’ 등의 겉치레로 겸양하는 말을 쓰지는 않았으며, 자신을 지고지상의 황제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조광윤은 “홀로 우뚝 솟은 바위처럼 고독할지언정, 옥처럼 희소한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황궁에서 집무할 때에 대전(大殿)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열린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추앙을 받았다. 조광윤은 신하와 백성들을 제압하려 하지 않았으나, 결코 졸렬하고 나약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