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제 활성화를 위해 상업을 개방
오대(五代)시기 이래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고 왕조의 교체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대개 왕조의 임금들은 무력으로 자신의 제위를 지키는 것만 알았지 경제를 발전시키는 문제는 안중(眼中)에도 없었다. 후주의 세종이나 후당의 명종과 같이 일부 경제를 중시한 제왕이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논에 수확이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비록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했지만 경제는 별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오대시기에 중국경제는 크게 퇴보하는 현상마저 빚어졌다.
후주의 세종은 경제적 안목이 있는 황제였다. 경제를 발전시켜야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중국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은 크게 물자를 원활히 유통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유통의 매개체인 화폐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장기간 동전(銅錢)을 만들지 않은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훼손하여 식기나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유통되는 동전의 수량은 갈수록 적어졌다. 이에 세종은 동(銅)을 수집하여 화폐를 만드는 전문기구를 설치했다.
다만 조정의 예기(禮器)와 병기(兵器), 사찰의 종기(鍾器), 요발(鐃鈸), 풍경(風磬) 등은 보류하되, 기타 백성의 동기(銅器)와 불상(佛像)은 모두 관청에 바치도록 하고 관청에서는 그에 상당한 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후주의 후기에 화폐는 비교적 풍족했고 사회의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세종이 강력하게 추진한 화폐정책은 조광윤이 경제정책을 펼쳐나가는데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국가재정을 다스려 나가는데 있어 지혜와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그는 이전 왕조의 세종이 실시했던 훌륭한 경제정책을 잘 활용했고, 그 바탕 위에 일련의 새로운 경제정책을 수립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사업이 없으면 살아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백성이 화폐가 부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의 세금과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그는 상품유통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우선 염곡법(鹽曲法)의 제한을 완화했다. 송나라 초기에 국가는 소금과 술에 대해 전매(專賣)제도를 실시하여 상인들이 소금과 술을 팔고 운송하는 것을 제한했다. 961년(태조2) 4월부터 조정은 소금, 술 등 물품의 판매에 대한 제한을 점차 완화시키기 시작했고 또 그에 대한 처벌수위를 낮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