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말 타고 꽃구경 하듯이’ 모양새만 내면서 가식적으로 농민들의 고통을 보살피는 척 했던 제왕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황은(皇恩)을 조금 베풀기라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까봐 전전긍긍했다.
조광윤은 이러한 가식적인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는 황제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꾸밈이 없이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본심은 결코 꾸며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치들을 취했다.
조광윤은 다방면으로 민생을 파악하기 위해 외지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신하들은 반드시 백성의 어려움과 이해관계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토록 명했다. 백성의 상황을 똑똑히 알아야 조정에서 위업을 쌓을 수 있고 제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사업시행에 온갖 힘을 쏟아 부으면서 보다 많은 일을 해내고 실속 있는 일을 하여 민생의 상황을 파악한 기초 위에서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965년(태조6) 8월에 조광윤은 재상, 추밀사, 변경윤(汴京尹), 한림학사 등 조정의 주요 인물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서 그는 특별히 농민문제에 대해 거론했다.
「무지한 백성들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번후(藩侯)로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부양하지 않고 가혹하게 학대한다면 짐(朕)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의 뜻은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의 행정책임자들은 백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다. 백성이 무식하고 아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이들은 성심으로 백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송태조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 진실했던 것이다.
황제가 된 후 그는 농민들이 비옥한 땅에서 농사짓고 보다 많은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게 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의 희망은 농민들이 좋은 종자를 선택하고 농기구를 잘 갖춘 다음 경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 전쟁이 없어 농민들은 더 이상 총칼을 메고 병역에 나갈 필요 없이 예리한 쟁기를 들고 논밭을 경작할 것을 희망했다. 황제로서 그는 오로지 백성들의 생활이 풍부해져야 조정이 넉넉해질 수 있고, 농민들에게 남아도는 식량이 있어야 조정과 적대시하지 않으며 조정이 여름, 가을 두 계절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송나라 건국 초기에 조광윤은 정권을 확고히 세워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을 통일해야 했다. 그러나 가장 칭송받아야 할 점은 그는 농민을 잊지 않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실시해 나라 재정을 충실하게 관리했던 점이다. 특히 청년시절 유랑생활을 했던 그는 농민의 고초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 자신이 먹고 쓰는 것은 모두 다 농민에게서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바람은 농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자신은 남는 부분을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조정)는 남는 것을 얻으며 농민의 것을 먹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