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수입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광윤은 한동안 금지했던 차엽전매(茶葉專賣)를 회복시키고, 나라가 차엽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964년(태조5) 8월에 변경(汴京), 건안(建安), 한양(漢陽), 기구(蘄口) 등지에 점포를 설치하고 차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965년(태조6) 9월에는 회남전운사(淮南轉運使) 소효(蘇曉)가 회남(淮南)의 기(蘄), 황(黃), 서(舒), 노(盧), 수(壽) 5개 주에 14개 점포를 설치하고 차엽을 전매토록 건의하자 조광윤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 차엽점포들이 개장하자 재원이 끊임없이 확보되었고 회남 5개 주의 차엽점포들에서만 해마다 수입이 백여만 관에 달해 재정수입을 올리는데 크게 한몫을 했다.
아울러 조광윤은 제거차마사(提擧茶馬司)를 설치해 차(茶)와 말(馬)을 교환하는 일을 맡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물론 전쟁에 필요한 말을 충분히 확보하는 군사전략을 충실하게 실행했다.
조광윤은 나라경제를 다스림에 있어서 비록 농업을 기본으로 했으나 이와 같이 잠재력을 발굴하여 여러 면에서 재정수입을 확보했다.
특히 상업에 대해 중시하고 보호조치를 취하며 상업규제에 대한 완화정책을 실시해 상업을 발전시키고 상품유통을 활성화시켰으며 재정수입이 크게 늘어나게 했다. 후주의 세종이 동(銅)을 수집하여 동전(銅錢)을 주조했다면, 송태조 조광윤은 그 기초 위에서 상업을 크게 부흥시켰다.
송태조 조광윤은 지적했다.
「“농민이 나서지 않으면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수공업자가 나서지 않으면 물품이 부족하게 되며, 상인이 나서지 않으면 삼보(三寶)가 없어진다.”고 한 옛말은 아주 옳은 말이다.」
조광윤은 ‘농(農), 공(工), 상(商)’의 삼보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 땅과 백성을 얻게 되었고 정사를 바로 잡고 재원을 충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