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6)▶ ‘의리의 사나이’ 조광윤과 미녀 경낭(京娘) 이야기 집을 떠난 조광윤은 황하를 거슬러 관서(關西), 호북(湖北)을 거쳐 북쪽의 전주(澶州)로 가는 기나긴 여행길에서 숱한 일을 겪게 된다. 그래서 후세의 문인들은 ‘협객(俠客) 조광윤’의 호방한 의협심을 흥미진진하게 엮어냈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유랑시절의 조광윤은 “힘이 장사여서 누구도 당할 수 없었으며, 기개가 사해(四海)를 덮을 정도로 웅대했고, 천하호걸들과 인연 맺기를 좋아했고, 길을 가다가도 불의한 일을 보면 검을 빼들고 약자를 도와 강자를 제압하는 오지랖이 넓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쓴 소설 이는 조광윤이 태원성 부근 태항산(太行山) 동쪽 기슭에 있는 청유관(淸油觀)의 도사(道士)로 있는 숙부(叔父) 조경청(趙景淸)을 만나기 위해 곡양(曲陽)에 들렀을 때의 이야기이다. 도관(道觀)에 기도하러 왔다가 외딴 방에서 불량배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있는 여인의 비명소리를 들은 조광윤은 번개같이 뛰어 들어가 모두 때려누이고 그녀를 구해준다. 그녀는 경낭(京娘)이라는 산서(山西) 영제(永濟)에 사는 17세의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5)3. 유랑(流浪) 생활 중에 일어났던 미담(美談) 동준회의 등쌀에 못 이겨 수주를 떠나 다시 여기저기 부딪치며 떠돌아다니던 조광윤은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덧 양양(襄陽)까지 도달했다. 그는 노잣돈이 바닥이 나서 어느 절에서 얻어먹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한 노승(老僧)을 만났다.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차린 노승은 “한수 이남은 각 정권이 안정되어 발전 가능성이 크지 않고 북방은 난세에 처해 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땅이니,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북쪽으로 가라.”고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조광윤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양양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승이 그에게 일러준 말은 어지럽고 복잡한 시대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노승의 말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응천부(應天府) 즉 지금의 북경 남쪽에 있는 상구시(商丘市)를 지나갈 때의 일이다. 조광윤은 술을 한잔 마시고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막막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고신묘(高辛庙)’라는 절간에 들어가 점을 쳐서 앞날의 운명을 알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4)2. 조광윤의 기량을 시기한 동준회(董遵誨) 복주에서 왕언초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다시 길을 떠난 조광윤은 남쪽으로 내려가, 이번에는 호북(湖北)의 수주(隨州)로 가서 그곳 자사로 있는 아버지의 친구 동종본(董宗本)을 찾아갔다. 동종본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부친께서는 어떻게 지내시오?」 조광윤은 다소 안심이 되어 대답했다. 「부친은 곽위장군 휘하에서 절도사들의 반란을 토벌하고 계십니다.」 동종본이 다시 물었다. 「공자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조광윤이 희망을 갖고 대답했다. 「이제 저도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관직을 얻어 자리를 잡고 싶습니다.」 마침 동종본이 기꺼이 그를 받아주어 수주에 일단 거처를 정했다. 문무를 겸비한 ‘준비된 무장’으로서 큰 뜻을 품고 있던 조광윤은 동종본 밑에서 관직을 얻어 큰 뜻을 펼쳐보려는 부푼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보다 기량이 뛰어나고 그릇이 큰 사람을 보면 시기하는 자들이 있는 법이다. 당시 아버지 밑에서 군관 아교(牙校)로 있던 동준회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동준회는 아버지의 힘을 믿고 조광윤을 못살게 괴롭혔기 때문에 조광윤은 매번 그를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3)1. 복주방어사(復州防禦使) 왕언초(王彦超)의 문전박대 조광윤은 가족들이 있는 변경(汴京)을 떠나 황하(黃河)를 거슬러 올라가 전쟁이 없는 서쪽의 섬서(陝西)와 감숙(甘肅) 지방을 향해 발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2년 동안 떠돌이생활을 하는 동안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감숙지방의 위주(渭州) 반원현(潘原縣)에 들렀을 때의 무용담이다. 떠돌이 청년 조광윤이 저잣거리에서 시장사람들과 어울려 도박을 하여 큰돈을 땄는데 야바위꾼들이 돈을 주지 않자, 불의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전광석화 같이 때려눕히고 돈을 찾았다는 것이다. ▲ 중국의 행정구역도 그는 서쪽의 섬서와 감숙에서 허구한 날을 보냈으나 노자만 축내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사회에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아는 사람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먼저 아버지의 옛 부하로 복주방어사(復州防禦使)로 있는 왕언초(王彦超)를 찾아갔다. 왕언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공자(公子)는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소?」 조광윤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이곳에서 관직을 얻어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왕언초가 대답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2)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왕족이나 군벌(軍閥) 출신이 아닌 조광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관직이 없었다. 그는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아내의 따뜻한 품을 떠나 혼자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전쟁 통의 난세 속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요즘 같으면 대학에 다닐 나이에 그는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두씨도 장남이 일찍 죽어서 장남 노릇을 하던 조광윤을 더 이상 가정이라는 좁은 새장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참새나 제비 같은 작은 새가 아니라 창공을 높이 나는 독수리와 같은 ‘대붕(大鵬)’이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을 마음으로부터 응원했다. 온 세상이 전쟁으로 벌집 쑤신 듯 험악한 시절, 두려움 없이 거친 세상으로 나가 홀로 부딪히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보려는 그의 강한 의지는 서양의 인생관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과도 같다. 한편, 조광윤의 어려웠던 집안사정이 그를 밖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다. 그는 이미 3년 전(945년) 19세 때 부모의 명에 따라 금군장교 하경사(賀景思)의 장녀와 결혼했다. 결혼한 이듬해인 946년 12월 거란의 후진(後晋) 침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1)「어머니, 이제 길을 떠나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게 지내세요.」 청년 조광윤은 어머니 두씨(杜氏)에게 하직을 고했다. 「오냐, 집안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라. 부디 험한 객지생활에 몸성히 지내거라.」 남편이 무장이라 전쟁터를 떠돌면서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가난한 집안 살림과 아이들의 교육까지 도맡아 왔던 여장부여서 평소 말수가 적고 엄하기만 하던 두씨부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시집온 지 삼년밖에 안된 아내 하씨(賀氏)는 옆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이들의 애틋한 이별의 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에는 맑은 아침햇살을 받은 오동나무 가지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이제 스물두 살의 피 끓는 청년 조광윤, 그동안 밤낮으로 무예를 연마해 두 어깨는 태산이라도 둘러멜 것같이 넓었고 몸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반듯하게 잘 생긴 얼굴에 큰 귀, 짙고 깨끗한 눈썹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닌 그의 범상치 않은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넘쳐흘렀다. 「어머니 제 걱정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저는 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어요. 이제 드넓은 세상에 나가 마음껏 날고 싶어요. 반드시 출세하여 가문을 빛낼게요. 그럼, 이
제3절 조광윤의 어린 시절 (03)사실 중국 무술은 한자 ‘武術’의 중국발음 ‘우슈(wushu)’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반에서는 이를 ‘쿵후’라고 즐겨 쓰는데 이는 한자 ‘功夫’의 중국식 발음이다. ‘우슈’는 근래 중국정부가 체력증진과 국위선양을 위한 스포츠종목으로 변화시켜 올림픽종목에 넣기 위해 태조장권을 포함한 여러 장권(掌拳)을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우슈종목 중에서 대표적인 장권(長拳), 남권(南拳), 태극권(太極拳)은 중국 권술(拳術)의 대명사가 되었다. ▶ 태조장권(太祖長拳)의 의미 깊은 무공초식(武功招式) 재미있는 사실은 조광윤이 창안해낸 태조장권의 무공초식 중에 ‘형진참장(衡陳斬將)’과 ‘하삭입위(河朔立威)’라는 것이 있다. ‘무공초식’이라 함은 무술, 무예 등을 익히는 데 필요한 기본동작을 말한다. ‘형진참장’의 유래를 살펴보자. 963년(태조4) 조광윤이 황제가 된지 막 3년이 지났을 무렵, 호남왕(湖南王) 주보권(周保權)이 송태조에게 형주자사(衡州刺史) 장문표(張文表)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원병을 보내 반란을 평정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송태조는 장문표반란 진압을 기회로 형남(荊南)과 호남(湖南)의 두 정권을 일거에 평정
제3절 조광윤의 어린 시절 (02)한편, 『송사』와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서는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난 후에 어렸을 적에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신문열(辛文悅)을 태자중윤판태부사(太子中允判太府寺)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 시종훈(柴宗訓)이 정왕(鄭王)으로 강등되어 방주(房州)에 거주하고 있을 때인 969년(태조10) 12월 25일에 조광윤은 신문열을 방주 지주(知州)로 임명했다. 다른 스승들과는 달리 조광윤은 신문열을 존경하고 황제가 되고 난 후에도 우대했다. 또한 신문열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그는 상당히 복잡하고 다중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그가 방주지주로 부임한지 2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인 973년(태조14) 3월, 신문열이 962년(태조3)부터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정왕 시종훈의 부인 모용왕비(慕容王妃)를 겁탈하여 그녀가 강물에 빠져죽자 시종훈이 울분을 참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은 굶어죽었다고 한다. 그때 시종훈의 나이는 20세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추론해 보면, 신문열은 제자인 송태조 조광윤이 나이 많은 자기를 방주지주로
제3절 조광윤의 어린 시절 (01)조광윤이 태어나서 7세까지의 어린 시절은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재위하던 시기였다. 당시 후당은 상당히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안정된 시기여서 전쟁이 없었다. 전통적인 관료가문에서 태어난 조광윤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 두씨에게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세 명의 선생에게 유가경전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유가경전(儒家經典) 공부보다는 병정놀이와 무예 익히기를 좋아해서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썩 모범적인 아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1. 세 명의 은사(恩師) 소년 조광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선생은 진학구(陳學究), 조학구(趙學究), 신문열(辛文悅) 등 모두 세 명이다. 여기에서 ‘학구(學究)’란 서당 또는 사숙(私塾)의 선생을 말한다. 세 명의 선생 중 진학구와 신문열은 서당의 선생이었고, 조학구는 ‘가숙(家塾)’의 선생으로 오늘날의 가정교사에 해당한다.『손공담포(孫公談圃)』에는 ‘진학구’가 낙양의 협마영 앞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버지 조홍은이 조광윤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가서 입학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조광윤은 남들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
제2절 당나라 도인(道人) 조현랑(趙玄朗)의 5대손 (02)조광윤은 당말의 고조부 때부터 대대로 탁군을 중심으로 지방관직을 지냈던 관료가문이었지만, 오대시기를 거치는 동안 조홍은 때부터 무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광윤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관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 때까지의 관직으로 볼 때, 그의 집안은 중앙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는 아니었고, 주(州)와 현(縣) 단위의 지방수령과 금군(禁軍)의 중급장교에서 고급장교로 발전할 정도의 지배계급 중층부를 이루는 가문이었다. 이와 같이 조광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말단 병사로 후한(後漢)의 군에 입대한 그는 용맹스런 무장으로 성장하여 금군의 최고사령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송나라를 세우고 개국황제가 됨으로써 조씨(趙氏)가문을 중국 최고의 위치로 끌어 올렸다. 그가 청년시절 유랑생활을 떠나면서 어머니 두씨(杜氏)에게 가문을 빛내겠다고 한 다짐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성씨(姓氏)는 모두 4,700여개가 된다고 하는데, 그 중 조씨(趙氏) 성(姓)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