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려한 비상(飛翔)을 위한 용틀임 <09>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1)

「어머니, 이제 길을 떠나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게 지내세요.」
청년 조광윤은 어머니 두씨(杜氏)에게 하직을 고했다.
「오냐, 집안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라. 부디 험한 객지생활에 몸성히 지내거라.」
남편이 무장이라 전쟁터를 떠돌면서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가난한 집안 살림과 아이들의 교육까지 도맡아 왔던 여장부여서 평소 말수가 적고 엄하기만 하던 두씨부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시집온 지 삼년밖에 안된 아내 하씨(賀氏)는 옆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이들의 애틋한 이별의 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에는 맑은 아침햇살을 받은 오동나무 가지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이제 스물두 살의 피 끓는 청년 조광윤, 그동안 밤낮으로 무예를 연마해 두 어깨는 태산이라도 둘러멜 것같이 넓었고 몸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반듯하게 잘 생긴 얼굴에 큰 귀, 짙고 깨끗한 눈썹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닌 그의 범상치 않은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넘쳐흘렀다.
「어머니 제 걱정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저는 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어요. 이제 드넓은 세상에 나가 마음껏 날고 싶어요. 반드시 출세하여 가문을 빛낼게요.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열 살 난 동생 광의(匡義)의 손을 잡고 동구 밖까지 따라나섰다. 그리고는 그의 뒷모습이 멀리 산모롱이를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식구들은 그가 사라진 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결혼한 지 삼년이 다 되도록 일점 혈육하나 남기지 않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길을 떠나는 남편을 보내려니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조광윤이 태어날 무렵의 중국은 당나라 멸망 후, 열개도 넘는 왕국으로 쪼개져 53년 동안 뒤엉켜 싸우면서 패권(覇權)을 다투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대였다. 당시 우리 한국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는데,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통일신라가 거의 망해 가고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이 혼전을 거듭하면서 후삼국시대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던 무렵이었다. 조광윤이 유랑의 길을 떠난 948년, 오대(五代)시기의 네 번째 왕조 후한(後漢)을 세운 유지원이 죽고 그의 아들 유승우(劉承祐)가 은제(隱帝)로 즉위했다. 그때 조홍은은 후한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 휘하의 무장으로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제3대왕 정종(定宗)이 재위하던 때로, 이해에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유명한 강감찬(姜邯贊)장군이 낙성대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