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려한 비상(飛翔)을 위한 용틀임 <05>

제2절 당나라 도인(道人) 조현랑(趙玄朗)의 5대손 (02)

조광윤은 당말의 고조부 때부터 대대로 탁군을 중심으로 지방관직을 지냈던 관료가문이었지만, 오대시기를 거치는 동안 조홍은 때부터 무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광윤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관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 때까지의 관직으로 볼 때, 그의 집안은 중앙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는 아니었고, 주(州)와 현(縣) 단위의 지방수령과 금군(禁軍)의 중급장교에서 고급장교로 발전할 정도의 지배계급 중층부를 이루는 가문이었다. 이와 같이 조광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무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말단 병사로 후한(後漢)의 군에 입대한 그는 용맹스런 무장으로 성장하여 금군의 최고사령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송나라를 세우고 개국황제가 됨으로써 조씨(趙氏)가문을 중국 최고의 위치로 끌어 올렸다. 그가 청년시절 유랑생활을 떠나면서 어머니 두씨(杜氏)에게 가문을 빛내겠다고 한 다짐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성씨(姓氏)는 모두 4,700여개가 된다고 하는데, 그 중 조씨(趙氏) 성(姓)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넘는 약 2,800만 명으로 여덟 번째로 많으며, 전체 13억 인구 중 약 2.1%를 차지하고 있다.

 

『송사』에서는 송태조 조광윤을 ‘탁군인(涿郡人)’, ‘탁군조씨(涿郡趙氏)’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탁군조씨의 먼 조상은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후예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신화에 가까워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그의 조상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조(趙)’나라 왕족이며, 삼국지의 ‘오호장군(五虎將軍)’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의 후예라고도 한다. 조광윤은 탁군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하지 않았고 이 지역과 직접적 관련도 없지만, 당나라 때부터 선조들이 살았기 때문에 이곳을 조광윤가문의 본향(本鄕)이라 부른다. ‘탁군(涿郡)’은 유비(劉備)의 고향이며 그가 미천할 때 짚신과 돗자리를 짜서 팔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원래 이곳은 중원(中原)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로서,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高句麗)원정 준비를 위해 이곳까지 ‘영제거(永濟渠)’라는 운하를 건설하면서부터 군사요충지로 발전했다. 수양제와 당태종이 고구려원정 때 수시로 이곳에 행차하여 출정군사들을 격려했던 곳이다. 이러한 군사요충지를 본향으로 하여 발전한 조씨가문에서 조광윤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나와서 군사기반을 성공적으로 다진 뒤 ‘송(宋)’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개국황제가 된 사실에서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담겨져 있는 숨은 힘의 작용을 느끼게 한다.

 

조광윤이 무장으로 있던 후주 시절부터 황제가 된 이후까지 계속 곁에서 보좌했던 명재상(名宰相) 조보(趙普)도 탁주(涿州)와 인접한 유주(幽州)의 계현(薊縣)사람이다. 아마도 조광윤이 자신의 본향에서 태어난 조보에 대해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신뢰했는지도 모른다. 937년 1월 조광윤이 11세가 되던 해 석경당(石敬瑭)이 거란의 도움을 받아 후진(後晋)을 건국하고 거란에게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떼어주었기 때문에 조광윤의 본향 탁주(涿州)와 조보의 고향 계현(薊縣)은 동시에 거란의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조광윤이 수많은 나라들을 평정하면서 천하를 통일했지만, 연운16주는 끝내 회복하지 못해 그는 본향인 탁주 땅을 밟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석경당이 후진을 개국하면서 수도를 낙양에서 후량의 수도였던 변경(汴京)으로 다시 옮김으로써, 조광윤은 어린 시절의 꿈이 서려있는 낙양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 변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석경당 때문에 본향인 탁주(涿州)를 잃었지만, 그가 군대에서 일취월장하면서 성장해 송나라를 세우고 167년 동안 수도를 삼았던 변경(汴京) 즉 오늘날의 개봉(開封)을 얻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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