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송사』와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서는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난 후에 어렸을 적에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신문열(辛文悅)을 태자중윤판태부사(太子中允判太府寺)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 시종훈(柴宗訓)이 정왕(鄭王)으로 강등되어 방주(房州)에 거주하고 있을 때인 969년(태조10) 12월 25일에 조광윤은 신문열을 방주 지주(知州)로 임명했다. 다른 스승들과는 달리 조광윤은 신문열을 존경하고 황제가 되고 난 후에도 우대했다. 또한 신문열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그는 상당히 복잡하고 다중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그가 방주지주로 부임한지 2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인 973년(태조14) 3월, 신문열이 962년(태조3)부터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정왕 시종훈의 부인 모용왕비(慕容王妃)를 겁탈하여 그녀가 강물에 빠져죽자 시종훈이 울분을 참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은 굶어죽었다고 한다. 그때 시종훈의 나이는 20세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추론해 보면, 신문열은 제자인 송태조 조광윤이 나이 많은 자기를 방주지주로 임명하자, 이에 감사하여 송나라의 백년대계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시종훈을 제거하여 송태조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는 일념에서 저지른 폭거(暴擧)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송사』「신문열전(辛文悅傳)」에는 신문열이 어느 날 ‘조광윤이 황제가 될 것을 암시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문열이 가마가 달린 마차를 맞이하여 절을 하고 보니 조광윤이었으며, 푸른색의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찾아와서는 마루에 걸터앉아 말하기를 “송주(宋州)의 관가(官家)에서 나를 이리 오라고 시켰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2. ‘태조장권(太祖長拳)’의 창시자
아버지 조홍은의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기상을 이어 받은 소년 조광윤은 창칼을 휘두르며 무예 익히기를 즐겨했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청년시절 조광윤은 체격이 당당하고 날랬으며, 성격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고 기개가 비범하여 한눈에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전통무예 ‘쿵후〔功夫; kungfu〕’의 절정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처럼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조광윤은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고강한 무예를 지녔던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송사』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길들이지 않은 사나운 말 한 필을 끌고 오자 안장과 굴레를 씌우기도 전에 조광윤이 다짜고짜 말에 올라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갑자기 성문을 향해 달리다가 그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성문의 문설주에 머리를 받힌 채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으면 크게 다쳤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말에게로 쫓아갔다. 광풍처럼 질주하던 말은 끝내 그에게 정복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조광윤은 타고난 무인 체질에다가 남달리 총명하기까지 하여 청소년시절 무술연마의 단계를 높여 가면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만들었다는 소림권(少林拳)을 발전시켜 “팔을 길게 내뻗어 적을 공격”하는 ‘장권(長拳)’을 만들어냈다. 그가 후일 송태조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를 ‘태조장권(太祖長拳)’ 또는 ‘태조권(太祖拳)’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조장권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중국무술 37개 문파 중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태조장권은 사권(査拳), 화권(華拳), 포권(砲拳), 홍권(洪拳), 소림권(少林拳) 등과 함께 중국의 6대 명권(名拳) 중의 하나이다. 이 권법의 특징은 주먹을 길게 내뻗어야 하므로, 자연히 동작이 크고 몸이 유연해지게 된다. 그리고 신속하게 주먹을 움직이는 것을 중시하며, 높이 뛰어올라 차는 기술이나 몸을 회전시키거나 뛰면서 도는 동작이 많다. “주먹은 유성(流星)과 같고 눈은 번개와 같다.”고 불렸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