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려한 비상(飛翔)을 위한 용틀임 <10>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2)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왕족이나 군벌(軍閥) 출신이 아닌 조광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관직이 없었다. 그는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아내의 따뜻한 품을 떠나 혼자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전쟁 통의 난세 속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요즘 같으면 대학에 다닐 나이에 그는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두씨도 장남이 일찍 죽어서 장남 노릇을 하던 조광윤을 더 이상 가정이라는 좁은 새장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참새나 제비 같은 작은 새가 아니라 창공을 높이 나는 독수리와 같은 ‘대붕(大鵬)’이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을 마음으로부터 응원했다. 온 세상이 전쟁으로 벌집 쑤신 듯 험악한 시절, 두려움 없이 거친 세상으로 나가 홀로 부딪히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보려는 그의 강한 의지는 서양의 인생관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과도 같다. 한편, 조광윤의 어려웠던 집안사정이 그를 밖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다. 그는 이미 3년 전(945년) 19세 때 부모의 명에 따라 금군장교 하경사(賀景思)의 장녀와 결혼했다. 결혼한 이듬해인 946년 12월 거란의 후진(後晋) 침입으로 그가 살고 있던 변경성(汴京城)이 함락되고 대혼란에 빠지면서 집안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다. 또 947년 조광윤이 21세 되던 해, 집에선 넷째 아들 광미(匡美)가 태어나자, 생계의 책임까지 맡게 된 그는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후한의 이수정(李守貞), 왕경숭(王景崇), 조사관(趙思綰) 등 3명의 절도사가 은제(隱帝) 즉위와 동시에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조홍은은 추밀사 곽위를 따라 반란진압을 위해 전쟁터로 떠났는데, 조광윤은 가족과 자신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중대결심을 하고 유랑생활을 떠나게 된다.

 

 

집을 떠난 조광윤은 아무도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다.
「어디로 가야할까?」
이리 저리 궁리하면서 정처 없이 길을 걷고 있노라니 어머니의 말씀이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부디 객지에서 몸성히 지내거라.」
그는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북쪽을 피해 우선 서쪽부터 가보기로 행로를 정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없는 서쪽이나 남쪽이 안전할거야. 그곳에 가서 자리를 잡아보고 안되면 아버지 친구들을 찾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