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려한 비상(飛翔)을 위한 용틀임 <13>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5)

3. 유랑(流浪) 생활 중에 일어났던 미담(美談)

 

동준회의 등쌀에 못 이겨 수주를 떠나 다시 여기저기 부딪치며 떠돌아다니던 조광윤은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덧 양양(襄陽)까지 도달했다. 그는 노잣돈이 바닥이 나서 어느 절에서 얻어먹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한 노승(老僧)을 만났다.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차린 노승은 “한수 이남은 각 정권이 안정되어 발전 가능성이 크지 않고 북방은 난세에 처해 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땅이니,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북쪽으로 가라.”고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조광윤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양양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승이 그에게 일러준 말은 어지럽고 복잡한 시대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노승의 말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응천부(應天府) 즉 지금의 북경 남쪽에 있는 상구시(商丘市)를 지나갈 때의 일이다. 조광윤은 술을 한잔 마시고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막막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고신묘(高辛庙)’라는 절간에 들어가 점을 쳐서 앞날의 운명을 알아보기로 했다. 향 피우는 제단 앞에서 점괘를 보는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군관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니 응답이 없었다. 다시 “절도사 자리에 오르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계속 아무런 응답이 없자 조급해진 그는 “절도사도 아니면 황제라도 되란 말입니까?” 하면서 대나무 막대기를 세차게 던지니 마침내 응답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졌거나 과장이 섞여있어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고신묘에서 점친 것이 사실이라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조광윤에게는 그 일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기대감을 불어넣어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 점괘가 천명(天命)의 발현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조광윤이 점을 쳤다는 응천부는 그가 황제가 되기 직전에 맡았던 귀덕(歸德)절도사의 관할지역인 송주(宋州)였으며, 황제가 된 후 이곳 지명을 따서 국호를 ‘송(宋)’으로 삼는 계기를 마련해준 뜻 깊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 무렵 조광윤이 어느 날 낙양에 있는 장수사(長壽寺)에 들러 대웅전 앞에서 낮잠을 한잠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그때 장경원(藏經院) 주지스님이 “웬 청년이 감히 대웅전 앞에서 잠을 자고 있는가?” 하고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노라니 붉은 뱀이 코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자는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범상치 않게 생긴 관상이었다. 주지스님은 노자가 떨어져 고생 중이던 조광윤에게 당나귀 한 마리와 노잣돈을 두둑하게 쥐어주며 말했다.
「전주(澶州)로 가서 시영(柴榮) 장군을 찾아보시오.」
시영은 당시 후한의 대장군 곽위의 처조카로서 그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있었는데 후일 후주의 명군 세종이 되었다.

 

곡절 많은 그의 방랑생활은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남기게 되었다. 장안성(長安城)에서 굶주림으로 고생하던 조광윤에게 한 음식점 주인이 양고기탕 한 그릇을 그냥 먹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에 감격하여 두 손 모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조광윤에 대한 묘사는 그가 예의를 아는 군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경주(涇州)의 어느 절에서 묵고 있을 때 그가 강인한 성품에 큰 뜻을 품고 있는 데 탄복하여, 노승이 앞날에 대한 법문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 이 절의 스님들이 조광윤의 의젓하고 늠름한 모습에 탄복하여 사찰 벽에 그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다고 한다.

 

조광윤이 유랑시절에 썼다는 두 수의 시(詩)가 전해지고 있는데, 평소 시문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던 그가 정말로 썼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가 어느 낯선 동네서 술을 한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이 되어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지었다는 시(詩)다.

 

 

 

 未離海底千山暗 (미리해저천산암)
바다 밑에서 해가 떠오르지 않았을 적엔 온 산이 캄캄하더니,
裳到天中萬國明 (상도천중만국명)
해가 중천에 솟아오르자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구나.

 

청년 조광윤이 일찍이 웅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캄캄하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 후 송나라를 세워 문화가 꽃피는 환한 세상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시(詩) 역시 해를 주제로 했는데,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맞는 감동과 소회를 노래한 시다. 시상이 웅건하고 장대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아침 해는 조광윤 자신을 가리키는 듯하다.

 

                                                  太陽初出光赫赫 (태양초출광혁혁) 
                                                  아침 해가 떠오르니 눈이 부시고.
                                                  千山萬山如火發 (천산만산여화발) 
                                                  이산 저산 모든 산에 불이 붙은 듯, 
                                                  日輪頃刻上天衢 (일륜경각상천구) 
                                                  해가 두둥실 하늘 높이 떠올라,
                                                  群星逐退與殘月 (군성축퇴여잔월) 
                                                  뭇별도 지는 달과 함께 사라지누나.

이처럼 떠돌이시절의 조광윤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중국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많으며, 또한 미화되고 있다. 유랑생활을 하던 기간은 조광윤에게 있어서 굴욕의 나날들이었으나, 천하를 떠돌며 온갖 풍상을 겪은 많은 경험들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식견을 넓혀 주었다. 특히,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행들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어지러운 사회현상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젊은 사람이 사회에서 한 몫을 하려면 본인의 자질과 여건도 중요하지만 현실 앞에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그는 터득하게 되었다. 조광윤은 생활현장에서 실상을 뼈저리게 체험을 함으로써, 그가 장차 군의 최고사령관을 거쳐 황제가 되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