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주방어사(復州防禦使) 왕언초(王彦超)의 문전박대
조광윤은 가족들이 있는 변경(汴京)을 떠나 황하(黃河)를 거슬러 올라가 전쟁이 없는 서쪽의 섬서(陝西)와 감숙(甘肅) 지방을 향해 발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2년 동안 떠돌이생활을 하는 동안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감숙지방의 위주(渭州) 반원현(潘原縣)에 들렀을 때의 무용담이다. 떠돌이 청년 조광윤이 저잣거리에서 시장사람들과 어울려 도박을 하여 큰돈을 땄는데 야바위꾼들이 돈을 주지 않자, 불의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전광석화 같이 때려눕히고 돈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서쪽의 섬서와 감숙에서 허구한 날을 보냈으나 노자만 축내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사회에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아는 사람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먼저 아버지의 옛 부하로 복주방어사(復州防禦使)로 있는 왕언초(王彦超)를 찾아갔다. 왕언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공자(公子)는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소?」
조광윤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이곳에서 관직을 얻어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왕언초가 대답했다.
「이곳은 공자가 보다시피 조그만 고을이라 남아있는 자리가 없소이다.」
왕언초는 이제 갓 세상에 나온 도련님이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조광윤에게 여비 몇 푼을 달랑 쥐어주고는 매정하게 그냥 떠나보냈다. 첫 번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구직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굳센 의지로 청운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그는 다시 여기저기로 용감하게 헤쳐 나갔다.
『송사』의 「왕언초전(王彦超傳)」에 따르면, 황제가 된 조광윤이 신하들에게 주연을 베풀며 활쏘기를 하는 자리에서 술이 한 순배 돌자 절도사로 있는 왕언초에게 물었다.
「경(卿)은 지난날 복주에 있을 때 짐(朕)이 형편이 어려워 의지하려고 찾아갔었는데, 그때 무슨 까닭으로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소?」
왕언초는 황급히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당시 신(臣)은 일개 주(州)의 방어사(防禦使)에 불과했습니다. 작은 물에 어찌 큰 용(龍)이 머물 수 있겠습니까? 그날 폐하께서 작은 고을에 머물지 않은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신(臣)이 폐하를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폐하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송태조 조광윤은 껄껄대며 웃어넘겼다.
이튿날 왕언초는 송태조에게 표(表)를 올려 죄를 청했다. 그러자 조광윤은 환관(宦官)을 보내 그를 위로하면서 다시 조정에 나오도록 명하고, 자신이 미천했던 시절에 문전박대한 일을 잊고 중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언초는 계속 관직에 유임되어 여러 곳의 절도사를 역임했고, 태종 때는 인국공(鄰國公)에 봉해졌다. 사실 왕언초의 말대로 그가 복주에서 첫 발길을 내딛었다면, 황제는 고사하고 군의 최고사령관 자리도 보전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후일 황제가 되는 곽위(郭威)와 시영(柴榮)의 부대에서 첫 출발을 하게 되어 그들의 흐름을 함께 타고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