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3. 송태조를 저주한 도곡(陶谷)을 문인이기 때문에 중용 도곡(陶谷)은 후주시기에 한림승지로 있었다. 글을 잘 쓰는 그는 후진, 후한, 후주 3개 왕조의 신하로 있었으나, 송나라에 와서는 새 정권을 저주한 혐의를 받게 되었다. 진교병변 후 조광윤이 군 장교들의 옹위를 받으며 황위에 등극하려 할 때 후주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대궐에 나와 후주 황제의 선위(禪位)의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포시(哺時)가 될 때까지 선위조서는 공표되지 않았고, 포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도곡은 옷소매에서 선위조서를 꺼내들었다. 도곡이 꾸물거리며 시간을 끈 데는 저의가 있었다. ‘포시’란 ‘신시(申時)’이며 황혼 무렵을 가리킨다. 즉, 황혼이 가까워 오면 어둠이 짙어진다는 곧 끝장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조광윤이 후주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황제의 선위위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포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조서가 당도하지 않았다. 사실상 조서는 벌써 도곡이 가지고 있었으나, 포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옷소매에서 꺼내들었으니 이것은 조광윤에게 명백한 저주(詛呪)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도곡과 같이 공공연히 황제의 등극에 대해 적의를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2. 지식인을 존중하고 제도적으로 보호 송태조 조광윤은 문인정치를 실시하고 오대(五代)시기 이래 군인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정치국면을 바로 잡으려고 애썼다. 그는 무장들의 정치참여를 억제하고 문인의 등용을 강력하게 추진해 문인정치를 치국의 목표로 삼았다. 조광윤이 문인을 많이 등용하고 중앙과 지방의 각급 정부에 문인들을 임용하면서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점차적으로 문인이 아니면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정치적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어 조광윤은 말했다. 「문인이 횡령하고 나쁜 짓을 한다 해도 군인들의 십분의 일에 불과하다.」 이 말은 피상적으로는 문인을 편애하는 것 같지만, 문인이란 공부해 지식을 얻은 사람들로서 그들이 배운 지식은 과거(科擧)의 학과(學科)들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모두 성현들의 가르침인 것이다. 중국의 성현들은 모두 도덕을 기반으로 하여 인의(仁義)의 견해로 도와 덕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학습하는 성현들의 책에는 횡령이나 독직의 내용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예컨대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부유함과 벼슬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나 정당한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누리지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호부시랑 설거정(薛居正)이 권지낭주(權知朗州)로 부임한 후, 이미 평정된 호남왕 주보권 치하에 있던 수천 명에 달하는 패잔병들이 왕단(汪端)의 통솔 하에 산속이나 호수에 밀집하여 소란을 피웠다. 하루 속히 이 비적무리를 소멸하기 위해 무장들은 낭주 전역을 몰살시키자고 주장했으나, 설거정은 엄명을 내려 이를 저지시켰다. 후에 설거정의 계획대로 두목 왕단만 생포함으로써 비적무리의 광란을 잠재웠다. 하나는 두목만 생포하는 작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역 전체를 도살하는 방법인데, 이와 같이 큰 차이를 나타낸 방법에서 문관인 설거정과 무장들의 일처리 방법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고 송태조의 정치적 결책이 얼마나 영명한가를 알 수 있다. 조광윤은 본시 살인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군주가 문신을 지주(知州)로 임명했으니, 그 지주 또한 살인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인덕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인정치의 이로운 점이다. 송나라는 건국 초기에 두 번의 반란평정과 다섯 번의 영토 확장을 거쳐 이러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신중보(辛仲甫)를 광주(光州)지주로 임명했다.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1. 지방장관(地方長官)을 무관에서 문관으로 교체 송태조 조광윤이 평화적 군사병변의 방식으로 후주를 교체해 송나라를 세운 직후, 절도사 이균과 이중진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 상산(常山)의 성덕군(成德軍)절도사 곽숭(郭崇)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음 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960년(태조1) 여름, 조광윤은 공을 들여 곽숭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선휘남원사(宣徽南元使) 구거윤(咎居潤)을 그 자리에 권지진주(權知鎭州)로 임명했다. 이것은 조광윤이 처음으로 문관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한 사례로서, 문신치국(文臣治國)의 목표를 향해 내디딘 고귀한 첫 걸음이었다. 이때부터 문관이 주정부의 장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조광윤은 문인정치를 실시한지 1년이 채 안 되어 사방의 절도사들은 거의 다 그에게 귀순했다. 그리하여 그의 문인정치로 천하를 다스리는 정책은 신속히 시행되었다. 960년(태조1) 10월에 송태조 조광윤은 문관 이처운(李處耘)을 권지양주(權知揚州)로 임명했다. 이번은 이중진 반란을 평정한 후에 병마도감(兵馬都監)으로 있는 그를 지주(知州)로 임명한
제3절 문신치국(文臣治國)의 실현문인정치는 송태조 조광윤이 심혈을 기울여 실행하고자 한 정치구도이며 이로부터 형성된 실행패턴이 관리임명의 문관제도였다. 지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송태조의 정치철학이고 문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외재적인 형태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조광윤이 실시한 문인정치의 내재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의 지식론과 도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은 전통적 도덕관을 숭상하고 문관이 통제하는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했고, 성현이 가르친 문화수준이 높고 단순하고 청렴한 이상적 사회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분투했다. 조광윤은 소년시절 때부터 『시경(詩經)』, 『상서(尙書)』, 『예악(禮樂)』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경전을 공부했다. 진교병변에 의해 하루아침에 황제가 되어 천하에 군림하게 된 그는 고대시기에 인의로 백성을 사랑하고 덕으로 정치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문인을 육성하고 등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시기의 무인들이 날뛰던 폐단을 없애고 세상을 바꾸어 혼란한 상태를 바로 잡으려고 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오대시기의 정치, 경제, 문화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황제가 된 후 그러한
제2절 공정한 과거제(科擧制) 실시4. 씨름으로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왕사종(王嗣宗) 975년(태조16), 송태조가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하기 바로 전해의 일이다. 늘 힘없는 백성 편에 서있는 황제 조광윤은 외롭고 가난한 자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孤貧開路>, 친히 과거의 문제를 출제하고 직접 고시장에 임석하여 궁정에서 치르는 전시(殿試)를 주관했다. 당시에는 시험답안을 제일 먼저 작성해 제출하는 사람이 장원(壯元)이 되었다. 그때 왕사종(王嗣宗)과 진식(陳識) 두 사람이 동시에 선두로 답안을 제출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 두 사람이 제출한 답안지를 읽어본 결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내용이 우수했다. 조광윤은 궁리 끝에 두 사람에게 씨름을 하여 장원을 결정하도록 명했다. 왕사종이 진식을 땅바닥에 메어꽂았다. 그래서 왕사종이 그해의 장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사람들은 왕사종을 보고 ‘씨름장원<手搏壯元>’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이것은 황제 조광윤의 장난스러운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무인 출신으로 두 사람이 똑같이 문장력이 뛰어나다면 건강한 사람이 당연히 경쟁력이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제2절 공정한 과거제(科擧制) 실시재상 범질(范質)의 조카인 범호(范皥)는 진사가 되기 위해 사전에 지은 글을 들고 한림학사 도곡(陶谷)을 찾아가서 추천해 줄 것을 청탁했다. 도곡은 그의 청탁을 흔쾌히 받아주고 진사에 급제하도록 돕겠다고 했다. 도곡은 송태조 조광윤이 황제즉위식을 거행할 때 일부러 황혼이 될 무렵까지 시간을 끌다가 선양조서를 꺼내 읽었던 송왕조를 저주하고 후주를 그리워했던 인물이다. 아무튼 가을에 과거시험을 실시할 때 어떤 사람이 조광윤에게 상소문을 올려 범호의 일을 거론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도곡을 질책했다. 「과거문제에서 권문세가 집안은 평민과 다투지 말아야 하오. 경(卿)의 언행은 청탁의 혐의를 받을 수 있소.」 범호도 자신의 일이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조광윤은 백성에 대해 인의를 베풀고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가난한 자제들과 부정하게 경쟁하며 과거시험에 도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범호와 같은 재상의 조카마저도 과거시험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비리를 막았던 것이다.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시기 이래의 반세기 동안 끊임없는 전란 때문에 나라의 경제가 파탄되고 사회에는 벼슬하려는 사람
제2절 공정한 과거제(科擧制) 실시3. 전시제(殿試制) 도입으로 과거(科擧) 부정행위 근절 ‘전시(殿試)’란 황제가 친히 황궁에서 급제한 진사들에 대해 면접을 실시함으로써 관리선발과정을 공개하고 투명화하는 것이다. 송나라 초기의 공거(貢擧)는 예부(禮部)에서 각 주정부가 선발한 합격자들에 대해 성시(省試)의 합격 여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때 주시험관(主試驗官)의 권한은 대단히 컸다. 공거에서 급제한 진사들은 나라의 기둥이고 과거는 사직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송태조 조광윤은 과거실시 과정에 친히 간섭하고 제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966년(태조7) 5월에 그는 자운루(紫雲樓) 아래서 강섭(姜涉) 등 진사시험 응시자들에 대해 친히 면접을 보았다. 972년(태조13)에는 또 친히 강무전(講武殿)에서 새로 급제한 진사들에 대해 친히 면접을 실시했다. 그리고 합격 여부를 재검토한 다음에야 명단을 발표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중국의 과거는 황제가 친히 관여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백성의 교화(敎化)에 심혈을 기울이고 무한한 인덕으로 백성을 보호하는 군주가 되려고 했다. 973년(태조14)에
제2절 공정한 과거제(科擧制) 실시2. 과거시험에 조정대신들의 입김 차단 과거제도의 수립은 봉건학도들에게 벼슬의 길을 열어 주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과거제도가 수립되면 인재의 선발이 질적으로 보장되고, 정책을 왜곡되지 않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통한 관리선발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런데 종전의 과거제도가 건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이 있었다. 과거시험에서 공평경쟁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송태조는 여러 면에서 개혁을 실시하고 과거제도를 보다 건전히 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를 뽑는 과거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었다.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으려는 조광윤은 당나라 과거제도를 답습했으나, 그 폐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시험을 부정으로 실시한다면 우수한 인재를 뽑으려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보장을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962년(태조3) 9월에 그는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짐(朕)은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으며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발탁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될 수 있겠는가? 과거제도의 폐단을 제거하
제2절 공정한 과거제(科擧制) 실시송태조 조광윤은 무인출신이었지만 관료가문의 후예답게 지식인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 유훈(遺訓)으로 후손들에게 ‘서약비(誓約碑)’까지 남기면서 끝까지 문인들을 지키고자 했다. 조광윤은 공개(公開), 공평(公平), 공정(公正)이라는 ‘3공정신(三公精神)’에 입각해 합리적 인재선발제도인 과거제도를 확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출세의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다 1. 과거제도는 인재 발굴의 원천 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며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조광윤은 과거제도를 조정관리 선발의 주요 원천으로 삼는 영명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서민 자제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관리선발제도는 백성을 아끼는 통치이념의 실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정권을 보다 공고히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최근 정부에서 고시제도(考試制度)를 없애려고 하다가 여당마저 반대하는 바람에, 그리고 특정부처 장관자녀의 부정 특채의 소용돌이 말려들어 포기한 바 있다. 송태조 조광윤의 예로 본다면, 이는 아예 발상 자체가 잘못된 현상으로 본다. 공무원은 국가의 녹(祿)을 먹고 국가 발전을 위해 공무를 집행해야 하는데, 오히려 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