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씨름으로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왕사종(王嗣宗)
975년(태조16), 송태조가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하기 바로 전해의 일이다.
늘 힘없는 백성 편에 서있는 황제 조광윤은 외롭고 가난한 자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孤貧開路>, 친히 과거의 문제를 출제하고 직접 고시장에 임석하여 궁정에서 치르는 전시(殿試)를 주관했다.
당시에는 시험답안을 제일 먼저 작성해 제출하는 사람이 장원(壯元)이 되었다. 그때 왕사종(王嗣宗)과 진식(陳識) 두 사람이 동시에 선두로 답안을 제출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 두 사람이 제출한 답안지를 읽어본 결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내용이 우수했다.
조광윤은 궁리 끝에 두 사람에게 씨름을 하여 장원을 결정하도록 명했다. 왕사종이 진식을 땅바닥에 메어꽂았다. 그래서 왕사종이 그해의 장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사람들은 왕사종을 보고 ‘씨름장원<手搏壯元>’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이것은 황제 조광윤의 장난스러운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무인 출신으로 두 사람이 똑같이 문장력이 뛰어나다면 건강한 사람이 당연히 경쟁력이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현명한 처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씨름으로 장원급제한 왕사종은 분주(汾州)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성격이 곧아 용감하게 진언을 잘 했다.
그는 태조, 태종, 진종까지 3대를 걸쳐 오랫동안 관리를 했는데, 진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냈으며, 『중릉자(中陵子)』 30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