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시제(殿試制) 도입으로 과거(科擧) 부정행위 근절
‘전시(殿試)’란 황제가 친히 황궁에서 급제한 진사들에 대해 면접을 실시함으로써 관리선발과정을 공개하고 투명화하는 것이다.
송나라 초기의 공거(貢擧)는 예부(禮部)에서 각 주정부가 선발한 합격자들에 대해 성시(省試)의 합격 여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때 주시험관(主試驗官)의 권한은 대단히 컸다.
공거에서 급제한 진사들은 나라의 기둥이고 과거는 사직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송태조 조광윤은 과거실시 과정에 친히 간섭하고 제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966년(태조7) 5월에 그는 자운루(紫雲樓) 아래서 강섭(姜涉) 등 진사시험 응시자들에 대해 친히 면접을 보았다.
972년(태조13)에는 또 친히 강무전(講武殿)에서 새로 급제한 진사들에 대해 친히 면접을 실시했다.
그리고 합격 여부를 재검토한 다음에야 명단을 발표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중국의 과거는 황제가 친히 관여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백성의 교화(敎化)에 심혈을 기울이고 무한한 인덕으로 백성을 보호하는 군주가 되려고 했다.
973년(태조14)에 한림학사 이방(李昉)이 공거(貢擧)를 주관하던 때였다. 조광윤은 급제한 진사들을 대전(大殿)에 불러들여 면접을 실시했다.
그런데 무제천(武濟川), 유준(劉浚) 등이 응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바람에 성적순서가 뒤바뀌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크게 불만스러워한 조광윤은 여기에 필경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제천이 이방과 한 고향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때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서사렴(徐士廉) 등이 이방의 불공정한 처사에 대해 고발하기 위해 황제의 알현을 간청했다. 조광윤은 특별히 서사렴의 고소를 듣기로 했다.
서사렴은 황제에게 이렇게 간했다.
「해마다 유생(儒生)을 뽑아 관리로 등용하는데 관리 숫자는 백 명에 불과하고 또 잘못 등용해 부여한 직책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천하를 위해 문무에 능한 자를 뽑아 주신다면 그 은혜를 저버릴 자가 없을 것이옵니다.」
송태조 조광윤은 서사렴의 간언을 받아들여 공원(貢院)에 명하여 낙방한 360명을 다시 등기하도록 하고 그들을 모두 접견했다.
그는 또 그 가운데서 195명을 선발하여 이미 보고한 진사들과 함께 다시 2차 시험을 보도록 하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영(李瑩)과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후척(侯陟)을 시험관으로 임명했다.
시험을 다 치른 후 송태조 조광윤은 친히 강무전(講武殿)에 가서 시험지를 검열하고 진사 26명을 합격시켰다.
그리고 오경(五經) 4명, 개원례(開元禮) 7명, 삼례(三禮) 38명, 삼전(三傳) 26명, 삼사(三史) 3명, 학구(學究) 18명, 명법(明法) 5명을 별도로 급제시키는 은혜를 베풀었다.
이리하여 ‘전시(殿試)’는 과거시험의 공식절차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과거시험에서 공평성을 잃은 공거의 주시험관 이방과 시험관 양가법(楊可法)에게는 강직처분을 내렸다. 사후에 조광윤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과거에 급제한 자들은 대부분 관료세력가 집안의 자제들이었고 서민자제들에게는 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짐(朕)은 친히 전시(殿試)를 거행해 공정성을 기하며 이전의 폐단들을 뿌리 뽑을 것이니라.」
불공정한 심판을 내렸던 이방(李昉)은 송태조가 즉위한 직후 송조(宋朝)에 적의를 품고 있어 조례(朝禮)에 참석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조광윤의 후덕한 인품과 넓은 도량으로 그는 평생 송조에서 관직을 누렸으며, 태종 때에는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재상인 동평장사(同平章事)까지 올랐다.
송나라 초기에는 과거에 부정(不正)한 일들이 많이 발생했다. 과거시험에서 주시험관을 담당했던 송백(宋白)은 뇌물을 받고 전시(殿試)에 올리는 명단을 작성하면서 비리를 저질렀다.
그는 대중의 비방과 공분이 두려워 합격자명단을 미리 황제에게 보고해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아보려고 했다.
보고를 듣고 난 송태조 조광윤은 송백의 속셈을 간파하고 그를 지탄했다.
「그대에게 과거시험을 주관하도록 위임한 이상 응시생의 합격여부는 그대가 결정해야지 왜 먼저 짐(朕)에게 말하는 것인가? 짐(朕)이 어떻게 취사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방(榜)을 내걸었다가 대중의 비방을 받게 되면 짐(朕)의 머리라도 벨 것인가?」
황제의 호된 질타에 겁을 먹은 송백은 급히 실제 성적순대로 다시 명단을 작성했다.
이와 같이 주시험관 송백의 비행은 조광윤의 분노를 자아냈고 이에 겁을 먹은 그는 황급히 시정함으로써 문제의 폭발을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