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거시험에 조정대신들의 입김 차단
과거제도의 수립은 봉건학도들에게 벼슬의 길을 열어 주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과거제도가 수립되면 인재의 선발이 질적으로 보장되고, 정책을 왜곡되지 않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통한 관리선발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런데 종전의 과거제도가 건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이 있었다.
과거시험에서 공평경쟁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송태조는 여러 면에서 개혁을 실시하고 과거제도를 보다 건전히 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를 뽑는 과거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었다.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으려는 조광윤은 당나라 과거제도를 답습했으나, 그 폐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시험을 부정으로 실시한다면 우수한 인재를 뽑으려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보장을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962년(태조3) 9월에 그는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짐(朕)은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으며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발탁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될 수 있겠는가? 과거제도의 폐단을 제거하고 명문(明文)으로 기준을 정해 선발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누구나 급제하기 위해 지거관(知擧官)의 자손이나 근친들을 만나서는 안되며, 어길 경우에는 어사대의 탄핵을 받게 될 것이다. 합격자명단은 성적에 따라 배열해야 한다.
구경과(九經科)와 오경과(五經科)의 쌍과(双科)만을 중히 여겨서는 안 되며, 주시험관(主試驗官)인 춘관(春官)을 ‘은문(恩門)’이나 ‘사문(師門)’으로 불러서도 안된다. 또한 춘관의 ‘문생(門生)’이라고 자칭해서도 안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과거시험에 대한 조광윤의 태도와 원칙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그는 과거의 목적은 우선 나라를 위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지 관리들 자신의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옛날 사람들은 벼슬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며, 과거(科擧)는 시험방식을 통해 공부한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광윤은 뇌물이나 어떤 인맥관계에 의해 실력이 부족한 자들이 급제하게 되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합격시키는 과거의 참 의미가 상실될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과거(科擧)의 예전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조광윤은 963년(태조4) 9월에 또다시 조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조신(朝臣)들은 과거에 인재를 추천할 수 없으며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에서의 청탁행위를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공공연히 부정을 행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근절했으며 공평하게 경쟁하는 과거의 원칙을 강화했다.
송나라는 해마다 한 번씩 치르는 과거를 실시했다. 968년(태조9) 3월, 왕호(王祜)가 과거시험을 주관하게 했다.
왕호는 진사 10명을 합격시켰는데 그중 한림학사 도곡(陶谷)의 아들 도병(陶邴)이 6등을 차지했다.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후 도곡은 입궁해 황제에게 감사의 말을 올렸다. 도곡의 아들이 진사에 급제한데 대해 미심쩍게 생각한 조광윤은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도곡의 자식교육이 시원찮다고 들었는데 도병이 어떻게 급제할 수 있었는가?」
그는 중서(中書)에게 명을 내려 합격한 사람들에게 재차 시험을 치르도록 명했다.
그 결과 도병의 성적은 여전히 우수했다. 비록 사사로운 친분에 의한 부정행위에 대한 의혹은 풀었지만, 조광윤은 조정대신들의 자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격히 규제해야 과거제도의 공정성을 유지하는데 이롭다고 생각했다.
조광윤이 도병의 합격을 의심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찍이 도곡의 다른 아들 도전(陶戩)이 과거시험을 볼 때, 당시 한림학사승지로 있던 도곡은 시험관인 해서(奚嶼)에게 뇌물을 주고 도전을 과거에 합격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광윤은 과거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특별조령을 내렸다.
「과거를 통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며 권문세가들은 더욱 성실을 기해야 한다.
짐(朕)이 들은 바로는 종파(宗派)집단을 형성하고 암암리에 서로 추천한다고 하는데, 학문과 문화 자질에 의해 공정한 평가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적 이익 때문에 직권을 남용할 수 있겠는가? 급제자들 가운데 관록을 먹는 집안의 자제나 예부(禮部)에 청탁한 자들에 대해서는 중서(中書)가 2차 시험을 치러야 할 것이다.」
조광윤은 대신들의 자제들은 부모의 덕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를 통해 공명(功名)을 얻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과거는 학문과 문화의 자질이 우수한 인재를 평가하는 것이며 권세를 남용함으로써 과거의 진정한 의미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대신들의 자제가 혜택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서민자제들보다 한 차례 더 시험을 보도록 함으로써,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실현코자 했다.
한편, 송태조 조광윤은 귀족자제들에 대해 항상 “출신이 좋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지방장관에 등용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이렇게 말했다.
「귀족자제들은 술이나 마시며 악기나 뜯을 줄 알았지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릴 줄 알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집정대신들의 자제나 친척이 조정의 요직을 담당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부모 그늘에 의존해 출세하려는 자는 모두 제조장(製造場)의 관리(官吏)를 거쳐야 하며,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직무에는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
귀족자제들은 차(茶) 제조장, 술 만드는 양조장, 창고 등의 관리원으로 임용하되 지방행정의 대권을 가지고 있는 주현의 책임자로 임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조령은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송나라 초기의 백년 간 귀족자제들은 요직에 임용된 자가 없었고, 모든 세력가의 자제들은 이부(吏部)에서 6품 이하의 관원으로 선발, 등용되었을 따름이었다. 이와 같이 백성을 위하고 관리를 다스리는 면에서 보여준 그의 고귀한 인품과 덕성은 역사상 그 어느 봉건황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이르기를, “군자는 세 가지 다른 모습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하며, 그 말을 들으면 엄정하니라.” 과거에 대한 정책을 실시함에 있어서 조광윤은 근엄한 태도를 보여 주었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서 가난한 집안이든 권문세가이든 우수하면 발탁하는 데서 우리는 그의 서민에 대해 온화하고 친근한 면을 엿볼 수 있다. 그
리고 그는 과거에 대한 공정성 요구에 있어서 엄정하고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군자의 세 가지 모습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