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노력들 (03)▶ 이균(李筠)의 반란을 예측하고 그의 아들에게 경고하다 송태조 즉위 초기에 후주의 절도사 이균이 반기(叛旗)를 들었다. 조광윤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이균의 아들 이수절이 변경(汴京)에 왔을 때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태자(太子)께서 어떤 일로 오셨는가?」 조광윤은 이수절을 ‘태자’라고 부름으로써 이균이 따로 나라를 세우려 하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당황한 이수절이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분명히 나쁜 자들이 아버지와 폐하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조광윤이 웃으면서 말했다.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말씀을 전하시오. 지난 시기 내가 황제가 아닐 때는 그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이제는 내가 황제가 되었으니 아버지더러 좀 양보하라고 하시오.」 여기에서 조광윤은 담소하는 가운데서 아주 자연스럽게 황제의 위엄을 보여 주었다. ▶ 넓고 두터운 마음으로 위엄을 세우다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이 조례(朝禮)에 참석하러 처자를 거느리고 변경(汴京)에 왔을
제1절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노력들 (02)2. 유연하고 온화한 방법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다 전제(專制)제왕들은 모두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한 제왕의 공적과 과실은 왕왕 “그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송태조 조광윤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권력을 성실하게 이행한 제왕이다. 그는 권력을 정치체제 개혁에 사용했고, 지방할거를 제한하고, 지방특권을 배제하고, 청렴하고 학식 있는 관리들을 양성하는데 사용했으며, 탐관오리와 법을 어긴 자들을 징벌하는데 사용했다. 후주 장병들의 옹립으로 황제가 된 조광윤은 즉위 초기에는 패권싸움에서 승리한 주무왕(周武王)이나 유방(劉邦)과는 달리 위엄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신하들과 함께 앉아 과일을 먹는 모습에서 어떻게 고고하고 장중한 위엄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는 단순히 하나의 의식(儀式)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사직을 지키기 위한 큰 사안으로 인식해야 했다. 그렇다면 조광윤은 무엇을 가지고 황제의 위엄을 세웠는가? 단지 재상이 앉아 있던 의자를 치워버리는 그런 잔꾀로 어떻게 진정한 위엄을 세울 수 있겠는가?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는 도량이 넓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제1절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노력들 (01)“강을 건넌 후 다리를 부숴버리는 격”이지만, 시대적 요청에 의해 황제가 된 조광윤에게 있어서 초미의 시급한 과제는 황제를 위협할 경우 가장 위험한 세력이 될 수 있는 금군 고위장군들에 대한 인사조치였다. 그 다음, 제도적으로 군과 중앙정부의 기능 및 권한을 상호통제시스템으로 조정하고 지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하여 중앙집권제를 성공적으로 확립함으로써, 오대시기를 거치면서 군화 발아래 짓밟혔던 황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넓은 포용력으로 옛 왕조의 문무신하들을 모두 그 자리에 있게 함으로써, 분열과 투쟁의 정치를 마감하고 ‘화합의 정치’와 ‘열린 정치’를 열어나갔다. 전제사회에서 지도자의 권위는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입에 발린 말만 하고 자화자찬하거나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 과감히 어떤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능력과 자질이 기본요건이다. 대개의 전제제왕들은 입으로는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거나, 늘 ‘밝은 정치’, ‘맑은 인사관리’를 부르짖지만 능력과는 관계없이 가까운 사람만 임용하며 측근자를 비호한다. ‘패거리정치’를 선호
제5절 최고의 국가경영자(CEO)로서 송태조의 세 가지 화두(話頭) (02)2. 두번째 화두(話頭): 백성의 평안을 위한 ‘민위방본’ 사상의 구현 ‘민위방본(民爲邦本)’은 봉건시대 하에서 보기 힘든 송태조의 정치사상이다. 조광윤은 황제로 재위했던 17년 동안 계속 이 사상을 구체적 정책으로 실현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들이 역력하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발상을 통해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방면에 걸쳐 백성들의 안위와 넉넉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기발한 정책들을 개발해냈다. 이에는 공평한 조세제도, 엄정한 사법제도, 공정한 과거제도, 농업 육성, 서민 구제 등 이루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극도로 혼란했던 무인집권시대를 거쳐 성장했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해야 했던 전제봉건 전제정치체제 하에서 어떻게 황제 스스로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민위방본’이라는 ‘전제판(專制版) 민주주의’ 사상이 발현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서양에서도 17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등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시작했는데, 조광윤은 전제체제 시대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힘에 밀려 마지못해 민주주의를 부분적으
제5절 최고의 국가경영자(CEO)로서 송태조의 세 가지 화두(話頭) (01)혼란했던 오대(五代)시기를 쉽게 마무리한 송태조 조광윤의 세 가지 화두는 (1)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 확립 (2) 후주 세종의 뒤를 이은 천하통일(天下統一) 실현 (3) ‘민위방본사상(民爲邦本思想)’ 구현이었다. 이 사상은 조광윤 국가경영철학의 백미(白眉)로서 ‘백성이 나라의 기틀’이라는 전제정치제도 하에서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이 즉위한 해에 이미 이균과 이중진의 두 반란을 평정한 이후 나라 안에 적대세력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즉위 2년째인 961년에 무엇보다도 먼저 황권(皇權)을 강화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가안정 책략을 수립했다. 조광윤은 책략가 조보에게 물었다. 「당나라 말기 이래 천하는 수십 년 동안 황제의 성(姓)이 여덟 번이나 바뀌었소. 그동안 전란은 끊이지 않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오? 짐(朕)은 천하의 병사들을 쉬게 하고 나라를 오래 지탱하기 위한 책략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보가 아뢰었다. 「폐하의 말씀은 천지인신(天地人神)의 복을 위한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3)5. 희이선생(希夷先生) 진단(陳摶)과 송태조 조광윤 조광윤이 황제로 등극할 때 화산(華山)에서 수도하고 있던 희이선생(希夷先生) 진단(陳摶)은 “천하는 이제부터 안정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희이선생(希夷先生)’이란 별호는 후일 송태종이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다.”고 한 도덕경의 말을 인용하면서 붙여주었다. 진단은 당말(唐末)에 태어나 오대시기를 거쳐 송태종 때까지 100세가 넘도록 살다간 도인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시 왕들이 자주 등극할 때마다 그는 근심 걱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왕다운 왕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어느 날 흰 나귀를 타고 화음으로 놀러가던 진단은 행인에게 ‘조광윤(趙匡胤)’이라는 사람이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해 송나라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왕다운 왕’이 나왔다.”며 너무 기뻐 손뼉을 치면서 박장대소를 하다가 그만 나귀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화산으로 돌아가 은둔하고 송태조 조광윤이 불러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희이선생이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나 조광윤은 허물로 삼지 않고 도리어 화산 일대의 세금징수를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2)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1) 세 명의 후주 재상 중 범질은 청렴 강직하여 남의 약점을 용납 못하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진교병변 소식을 들었을 때 속이 상해 왕부의 손을 아플 정도로 잡아 흔들었고 이를 악물어서 입에서는 피가 났었다. 그는 군사첩보를 치밀하게 검토하지 못하고 결정적 실수를 범한데 대해 땅을 치며 후회했다. 조광윤이 선양(禪讓)의식을 거행할 때도 범질은 무릎을 꿇지 않고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송조에 대한 적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조광윤은 범질의 이러한 소행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그를 재상으로 있게 하고 연로하고 병환이 깊어져 자발적으로 사임할 때까지 유임시켰다. 범질 또한 송조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조광윤에게 올렸다. 「사직을 영원히 지키는 출발점에서 황제의 자제(子弟)를 봉임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해야 합니다. 폐하의 동생인 광의(光義)는 군직을 맡고 있는 데 뛰어난 장군의 재목이고 번진(藩鎭)을 통솔할 능력 갖추고 있으며 나날이 신망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가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1) ▲ 송나라 건국 후 각국의 형세도 1. 황제 암살기도사건의 배후를 캐지 않다 조광윤이 후주 정권을 교체할 때 평화적 방식으로 유혈을 피했지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이상 여전히 후주의 충신과 그 자손들의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광윤은 어느 날 어가(御駕)를 타고 경성 시내를 순시하려고 했다. 새롭게 변한 경성의 모습과 새로운 왕조와 정치환경 속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둘러보고 싶었다. 어가가 서서히 거리를 지나 대계교(大溪橋)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쌩~!」하는 소리와 함께 예리한 화살 하나가 날아와 어가 뒤에 있는 노란 일산(日傘)에 꽂혔다. 대경실색한 호위병들이 황급히 어가를 둘러싸고 호위했다. 어가에 조용히 앉아 있던 조광윤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누군가 내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줘서 고맙구나!」 그는 화살이 빗발치고 창검이 숲을 이루는 전쟁터를 수없이 겪어 온 맹장이었기 때문에 화살 하나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을 명령했다. 이때 조정대신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더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8)병법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군대에 불리한 상황은 세 가지가 있다. 군대가 전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억지로 전진하게 하는 것, 군대가 후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억지로 후퇴하게 하는 것, 군 내부를 의심하여 필요 이상으로 견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중진은 바로 병법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을 범했다. 그는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원망을 품게 했다. 그가 장수들을 의심한 것은 큰 잘못이었고 장수들을 죽인 것은 더더욱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송군의 공격을 받기도 전에 그는 스스로 군심을 교란시켰고 실패의 액운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추밀사 조보는 이중진의 반역행보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이중진은 장강, 회하를 의지해 보루를 구축하고 한사코 방어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보제공자도 없고 병사들의 마음은 이미 다른데 가 있습니다. 용감하나 계략이 없고 계책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밖으로는 원조가 끊기고 안으로는 재물과 식량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속공을 해도 함락할 수 있고 천천히 공격을 해도 탈환할 수 있습니다.」 조보의 말은 아주 명백했다. 이때부터 조광윤은 이중진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7)조광윤은 병법의 내간(內間)을 활용하여, 적수순을 이용해 이중진을 설득해 송나라에 대한 진공계획을 뒤로 미루도록 함으로써, 이균의 반란을 평정할 때 앞뒤에 탈이 없도록 했다. 그러므로 병법에서는 ‘내간을 이용하는 것’은 신비하고 묘한 이치이며 군주의 법보(法寶)라고 했다. 적수순의 주도면밀한 작용에 의해 조광윤은 반란군이 협공하는 상황 없이 병력을 집중시켜 북방의 이균을 처단할 수 있었다. 조광윤은 이균의 반란을 평정하고 후주의 땅이었던 택주와 노주를 회복한 후 변경(汴京)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서야 이중진 처리방안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인덕을 중요시하는 조광윤은 그를 진압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다시 한 번 과오를 시정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는 육택사(六宅使) 진사회(陳思誨)를 파견해 철권(鐵券)과 조서를 들고 양주에 가서 위로하고, 상경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그리고 평로절도사로 임명해 양주에서 청주(靑州)로 이동하도록 했다. 양주에 도착한 진사회는 철권과 조서를 이중진에게 넘겨주었다. 철권과 조서를 받은 이중진은 겁이 났으나 경솔히 반란을 일으킬 수 없어서 진사회를 따라 입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