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군대에 불리한 상황은 세 가지가 있다. 군대가 전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억지로 전진하게 하는 것, 군대가 후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억지로 후퇴하게 하는 것, 군 내부를 의심하여 필요 이상으로 견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중진은 바로 병법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을 범했다. 그는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원망을 품게 했다. 그가 장수들을 의심한 것은 큰 잘못이었고 장수들을 죽인 것은 더더욱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송군의 공격을 받기도 전에 그는 스스로 군심을 교란시켰고 실패의 액운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추밀사 조보는 이중진의 반역행보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이중진은 장강, 회하를 의지해 보루를 구축하고 한사코 방어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보제공자도 없고 병사들의 마음은 이미 다른데 가 있습니다. 용감하나 계략이 없고 계책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밖으로는 원조가 끊기고 안으로는 재물과 식량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속공을 해도 함락할 수 있고 천천히 공격을 해도 탈환할 수 있습니다.」
조보의 말은 아주 명백했다. 이때부터 조광윤은 이중진의 반란행위에 대해 진압하기로 결심했으며, 이번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조광윤은 속전속결의 방침으로 회남을 되찾고 후주가 지배하던 지역을 전부 수복하기로 결심했다. 조광윤은 960년 9월 20일 이중진의 관직과 작위를 박탈한다는 조령을 내렸다. 이어서 10월 21일, 조령을 내려 친히 정벌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아우 조광의를 태내도부서(太內都府署)로, 오연조를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여여경은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임명했다. 석수신을 반란평정의 주장(主將)으로 삼고 왕심기를 부장(副將)으로 임명했다. 이처운을 도감(都監)으로 임명하고, 송연악(宋延渥)은 배진사(排陳使)로 임명해 전술을 책임지고 금군을 인솔해 이중진 정벌에 나서도록 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싸울 줄 아는 자는 작전을 필승기반 위에 세우므로 실패하게 될 적을 섬멸할 수 있다. 싸울 줄 아는 자는 항상 자신을 불패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적이 실패하게 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의 확신을 가진 다음 적과의 교전에 대한 전술을 탐구해야 한다.”
송태조 조광윤은 밝은 정치를 하고 반란군 진압 준비에 만전을 기해 불패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중진은 내외로 곤경에 빠지고 장병들의 마음을 떠나게 하여 스스로 필패의 늪에 빠지게 했다. 교만한 이중진에 비해 조광윤은 우세를 선점했으니 그는 싸울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친히 출정한 조광윤은 배를 타고 남하해 송주(宋州), 숙주(宿州)를 거쳐 사주(泗州)에 당도했다. 상륙 후 장병들에게 북을 치며 전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1월 11일, 송군은 양주성 밑에 접근했다. 조광윤이 친히 성 밑에까지 압박해온 것을 본 이중진의 장병들은 감히 저항할 자가 없었다. 그들은 교전도 하지 않고 뿔뿔이 도주했고 양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낙심한 이중진은 가족과 함께 분신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