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18>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1)

 

1. 황제 암살기도사건의 배후를 캐지 않다

 

조광윤이 후주 정권을 교체할 때 평화적 방식으로 유혈을 피했지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이상 여전히 후주의 충신과 그 자손들의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광윤은 어느 날 어가(御駕)를 타고 경성 시내를 순시하려고 했다. 새롭게 변한 경성의 모습과 새로운 왕조와 정치환경 속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둘러보고 싶었다. 어가가 서서히 거리를 지나 대계교(大溪橋)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쌩~!」하는 소리와 함께 예리한 화살 하나가 날아와 어가 뒤에 있는 노란 일산(日傘)에 꽂혔다. 대경실색한 호위병들이 황급히 어가를 둘러싸고 호위했다. 어가에 조용히 앉아 있던 조광윤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누군가 내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줘서 고맙구나!」

그는 화살이 빗발치고 창검이 숲을 이루는 전쟁터를 수없이 겪어 온 맹장이었기 때문에 화살 하나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을 명령했다. 이때 조정대신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어가를 막아섰다. 그제서야 조광윤은 하는 수 없이 어가를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위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행차를 나갔다가 암살당할 뻔한 것이다.

비록 암살기도가 무산되었지만 이는 조야(朝野) 인사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모두들 시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하수인을 붙잡아 배후의 주모자를 찾아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광윤은 이를 과단성 있게 저지함으로써 한 차례 피바람과 백성을 교란시키는 번거로운 수색작전을 피할 수 있었다.

후덕한 사람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남을 압박하지 않는 법이다. 조광윤은 암살당할 뻔했지만 암살자를 수색하지 않고 또 아랫사람들이 수색하려 하는 것을 저지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도심(道心)이 가득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원한을 품은 자에 대해 늘 인덕을 베풀어온 것은 조광윤의 일관된 품성이었다.

 

2. 조례(朝禮)를 거부한 이방(李昉)을 한림학사로 중용

 

조광윤에게 있어서 원한을 인덕으로써 보답한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후주의 한림학사 이방(李昉)은 뛰어난 학자로 세종이 친히 찾아내어 키워준 사람인데, 그는 늘 세종에게 감지덕지해 하고 충성을 다했다. 조광윤이 전전도점검으로서 금군을 통솔하고 있을 때 조정관리들의 마음은 이미 조광윤에게 쏠리고 사람마다 모두 그를 따랐다. 그러나 이방만은 세종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세종의 어린 아들 공제(恭帝)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보호하면서 조광윤에게 기웃거리지 않았다.

 

조광윤이 평화적 방식으로 후주를 교체하고 송조(宋朝)를 수립한 후 이와 같은 조서를 내렸다.

「재상은 본래의 재상을 그대로 유임하고, 추밀(樞密)은 본래의 추밀을 그대로 유임한다. 군직은 본래의 군직을 유지하고, 관직은 본래의 관직을 유지하면서 본래의 것을 바꾸지 않는다.」

송태조가 이러한 조서를 내리고 당시 조정의 문무백관이 다 송나라 조정에 가서 조례(朝禮)를 올렸으나 유독 이방만은 가지 않았다. 그는 후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송조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 강직한 후주의 옛 신하가 정권이 교체될 당시 귀순하지 않고 조례를 올리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했으나, 조광윤은 여전히 그에게 덕을 베풀어 이방이 여러 번 권지(權知)와 공거(貢擧)의 관직을 맡도록 했다. 그는 계속하여 관직에 유임되어 송태종 때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재상인 평장사(平章事)까지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