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연하고 온화한 방법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다
전제(專制)제왕들은 모두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한 제왕의 공적과 과실은 왕왕 “그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송태조 조광윤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권력을 성실하게 이행한 제왕이다. 그는 권력을 정치체제 개혁에 사용했고, 지방할거를 제한하고, 지방특권을 배제하고, 청렴하고 학식 있는 관리들을 양성하는데 사용했으며, 탐관오리와 법을 어긴 자들을 징벌하는데 사용했다.
후주 장병들의 옹립으로 황제가 된 조광윤은 즉위 초기에는 패권싸움에서 승리한 주무왕(周武王)이나 유방(劉邦)과는 달리 위엄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신하들과 함께 앉아 과일을 먹는 모습에서 어떻게 고고하고 장중한 위엄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는 단순히 하나의 의식(儀式)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사직을 지키기 위한 큰 사안으로 인식해야 했다.
그렇다면 조광윤은 무엇을 가지고 황제의 위엄을 세웠는가? 단지 재상이 앉아 있던 의자를 치워버리는 그런 잔꾀로 어떻게 진정한 위엄을 세울 수 있겠는가?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는 도량이 넓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거짓이 없으며, 작은 일로부터 생사와 관련된 큰일에 이르기까지 성심성의껏 처리해 나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황제의 위엄을 쌓아나가야 했다. 이른바 황제의 위엄과 예식이란 알현할 때 취하는 그런 형식적인 것만이 아니다.
전제체제 속에서 위의는 권위의 외재적 표현일 따름이다. 사람들이 한 집단의 핵심으로서 권위자를 인정해 주고 마음속으로부터 신봉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은 처음부터 계급이 엄격히 구분되는 황권을 수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엉겁결에 황제가 된 것처럼 그의 품성과 능력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덕망이 쌓이게 되고 점차 감히 범할 수 없는 위엄을 갖게 되었다.
▶ 후주의 옛 관리들을 모두 유임시키고, 개국공신들은 기다리게 하다
조광윤은 황제로 즉위한 후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고 이전 조정의 신하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래서 황권(皇權)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금군의 고위장군들에 대해서만 신속한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는 황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지방의 절도사들마저도 모두 그 자리에 유임시켰다. 오대의 관습에 따라 절도사직의 세습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실제로 두 이씨 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이러한 조치는 실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도가(道家)사상에 충실할 뿐 아니라 도량이 크고 과감했던 조광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병변의 역사적 사례를 보면 으레 피의 숙청이 뒤따랐으나, 사람 죽이기를 극도로 싫어한 그는 이와 같이 따뜻하고 관대한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진교병변에 참여한 개국공신들에게는 돌아갈 관직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개국공신들에게는 야박하다고 할 정도로 고관대작을 수여하지 않고 미미하거나 이름뿐인 승진만 시켰다. 다만 수하의 몇몇 책사들을 상징적으로 승진시켰지만 조정의 주요 관직에 배정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진교병변의 주도자이며 조광윤의 제일 책사인 조보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겸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 승진되었다. 추밀직학사는 직함만 있을 뿐 정식 관직이 아니며 학사(學士) 아래에 있는 직급이다.
유희고를 절도사판관에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승진시켰는 데 이름뿐인 한직이었다. 여여경은 관찰판관에서 급사중(給事中)으로 승진시켰는 데 부처의 인장이나 관리하는 한직이었고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라는 이름이 하나 더 붙었을 따름이다. 심륜은 섭관찰판관(攝觀察判官)에서 호부낭중(戶部郞中)으로 승진되었는데 일종의 비서관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