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19>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2)

 제4절 황제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갖가지 에피소드 (01)

 

세 명의 후주 재상 중 범질은 청렴 강직하여 남의 약점을 용납 못하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진교병변 소식을 들었을 때 속이 상해 왕부의 손을 아플 정도로 잡아 흔들었고 이를 악물어서 입에서는 피가 났었다. 그는 군사첩보를 치밀하게 검토하지 못하고 결정적 실수를 범한데 대해 땅을 치며 후회했다.

조광윤이 선양(禪讓)의식을 거행할 때도 범질은 무릎을 꿇지 않고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송조에 대한 적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조광윤은 범질의 이러한 소행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그를 재상으로 있게 하고 연로하고 병환이 깊어져 자발적으로 사임할 때까지 유임시켰다.

 

범질 또한 송조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조광윤에게 올렸다.

「사직을 영원히 지키는 출발점에서 황제의 자제(子弟)를 봉임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해야 합니다. 폐하의 동생인 광의(光義)는 군직을 맡고 있는 데 뛰어난 장군의 재목이고 번진(藩鎭)을 통솔할 능력 갖추고 있으며 나날이 신망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가주방어사(嘉州防禦使) 광미(光美)는 용맹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며 선행을 쌓고 있어 찬양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니 책봉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여여경과 추밀부사(樞密副使) 조보는 국정을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과 능력이 풍부합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이니 의지할만한 합니다. 인재를 널리 중용하시도록 건의를 올립니다.」

조광윤의 인품과 넓은 도량은 궁극적으로 범질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지난 시기 후주에 대한 아둔한 충성심을 버리고 새 조정을 위해 충실히 일하고 적극적으로 영재를 천거하는 태도를 보이게 했다.

 

4. 왕저(王著)의 술주정을 너그러이 용서하다

 

후주의 한림학사 왕저는 세종의 깊은 신임을 얻었던 사람이다. 세종은 평소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학사(學士)’라고 불러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세종이 임종 때 재상 범질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왕저는 번저(藩邸)의 옛 고향 사람인데 내가 죽으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시오.」

이와 같이 세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왕저는 당연히 후주정권을 찬탈한 조광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조광윤이 연회를 거행할 때 왕저는 술에 취한 것을 핑계로 큰소리로 소란을 피웠다. 조광윤은 그를 질책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부축해 자리를 뜨도록 했다. 그런데 왕저는 부축한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병풍 앞으로 다가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어사대(御史臺)에서 상소를 올려 황궁에서 통곡한 것은 전 왕조의 세종을 그리워하는 짓이니 엄벌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조광윤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게 말했다.

「짐(朕)이 평소 왕저(王著)를 잘 알고 있는데, 술주정을 한 것뿐이지 황궁을 소란스럽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오. 그리고 한 서생이 세종을 위해 울었다한들 무슨 걱정할 게 있겠소?」

어사대에서 올린 상주문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이 일은 그대로 끝나버렸다. 조광윤은 원한을 묻지 않고 은덕을 베풀었기 때문에 빨리 후주의 옛 신하들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었고, 그들도 마침내는 조광윤의 후덕함을 인식하고 마음을 돌려 새로 수립된 조정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