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16>

제3절 황제 즉위 첫해 ‘두 이씨(李氏)’의 반란 평정 (07)

조광윤은 병법의 내간(內間)을 활용하여, 적수순을 이용해 이중진을 설득해 송나라에 대한 진공계획을 뒤로 미루도록 함으로써, 이균의 반란을 평정할 때 앞뒤에 탈이 없도록 했다. 그러므로 병법에서는 ‘내간을 이용하는 것’은 신비하고 묘한 이치이며 군주의 법보(法寶)라고 했다. 적수순의 주도면밀한 작용에 의해 조광윤은 반란군이 협공하는 상황 없이 병력을 집중시켜 북방의 이균을 처단할 수 있었다.

조광윤은 이균의 반란을 평정하고 후주의 땅이었던 택주와 노주를 회복한 후 변경(汴京)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서야 이중진 처리방안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인덕을 중요시하는 조광윤은 그를 진압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다시 한 번 과오를 시정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는 육택사(六宅使) 진사회(陳思誨)를 파견해 철권(鐵券)과 조서를 들고 양주에 가서 위로하고, 상경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그리고 평로절도사로 임명해 양주에서 청주(靑州)로 이동하도록 했다. 양주에 도착한 진사회는 철권과 조서를 이중진에게 넘겨주었다.

철권과 조서를 받은 이중진은 겁이 났으나 경솔히 반란을 일으킬 수 없어서 진사회를 따라 입궁하기로 했다. 그런데 경계심이 많은 한 부하가 이 말을 듣고 달려와서 그의 상경(上京)을 있는 힘을 다해 저지했다.

이중진은 다시 의구심이 생겼다. 후주 황실의 근친인 자신이 앞으로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말대로 상경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태도를 돌변하여 진사회를 억류하고 성을 정비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해 송나라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때 조광윤이 이균을 평정한지 3개월이 훨씬 지났다.

이중진은 다급하게 송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했으나 자신에게 퇴로가 없는 것을 고려해 남당에 귀순하기로 하고 지원을 받으려 사람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광윤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고 이미 이균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남당왕 이경은 감히 송나라를 적대시할 수 없었다. 그는 이중진의 사자를 만나지 않고 이 사실을 송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이중진은 오히려 일을 망치고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병법에서 말했듯이 “제후의 계략에 대해 모르고 미리 포섭해서는 안 된다.” 이중진은 남당왕의 정치적 동향에 대해 근본을 모르면서 마음대로 남당에 귀순해 지원을 얻자고 했으니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용감하지도 않고 지략도 없는 사람이며 그의 교만함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그를 더 망하게 한 것은 이때 이중진의 진영내부에 분열이 생긴 것이었다. 양주도감(揚州都監) 안우규(安友規)가 이중진이 틀림없이 반란을 도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연루될까봐 송나라에 귀순했다. 조광윤은 그를 저주(滁州)자사로 임명했다.

수하 대장군인 안우규가 송나라에 귀순함으로써 이중진진영의 세력은 크게 약해졌다. 이는 송나라에 이중진을 진압하기 위한 승리의 조건을 제공했다. 조광윤이 병법에 근거해 안우규를 저주자사로 임명한 것은 바로 이중진을 정벌하기 위한 길잡이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이중진은 자연히 수하의 많은 장수들을 의심하게 되었고, 수십 명의 장수들을 하옥시켰다. 억울한 장수들은 계속 결백을 호소했다.

「우리는 모두 다 후주황실을 지키는 군사들입니다. 장군은 후주황실을 존중하고 받들어야 합니다. 왜 장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하도록 합니까?」

이중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그들을 전부 죽이고 말았다. 이는 그 자신을 망치는 일이었고 자신의 말로를 재촉하는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