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당나라 도인(道人) 조현랑(趙玄朗)의 5대손 (01)조광윤 가문은 당말(唐末) 고조부 이래 대대로 지방관리(地方官吏)를 지냈지만 권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망한 후 절도사를 비롯한 군벌에 의해 왕조가 수없이 바뀌고 임금과 신하 간에 알력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기의 중앙 고위관리들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쉽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평탄하고 그리 눈에 띄지 않은 조상들의 벼슬은 정권찬탈의 늪에서 벗어나 조광윤의 가정을 지켜 주었고, 생활은 넉넉지 않았지만 그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분위기 속에서 꿈 많은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관료가문이라는 배경은 소년 조광윤에게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성격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쳤으며, 후일 황제가 되고 난 후에 ‘문인정치’를 실현하는데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정사(正史)의 기록은 아니지만 중국의 각종 자료에 의하면, 조광윤의 5대조(五代祖)는 당나라 때 도교(道敎)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도인(道人) 조현랑(趙玄朗)이다. 조광윤 집안은 도교와 관련이 많은데 이는 아마도 조현랑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조광윤의 숙부 조경청
제1절 조광윤 출생 당시의 시대상황 (02)이존욱은 제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양자(養子) 이사원(李嗣源)의 반란으로 궁내에서 내응하던 연극배우 출신의 지휘사 곽종겸(郭從謙)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사원은 926년 명종(明宗)으로 즉위했는데, 오대시기의 14명의 황제 중에서 후주(後周)의 세종 시영(柴榮)과 함께 명군(名君)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 이유는 오대십국시대가 시작된 이후 20년 동안 수없는 전쟁과 살생이 계속되었는데, 명종은 전쟁을 멈추고 농업생산에 주력하여 몇 년간 풍년이 들어 혼란한 시기에 모처럼 6-7년간의 안정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종으로부터 황위를 빼앗은 명종이 장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조홍은을 달갑게 볼 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그는 ‘축출된 황제의 측근’으로 분류되어버린 것이다. 명종은 그를 금군에서 내쫓지는 않았지만 냉대하여 가정형편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927년 조광윤은 낙양 근교의 군영 협마영(夾馬營)에서 고고한 첫울음을 터뜨렸다. 명종 이후 형제간의 권력다툼으로 후당은 불과 건국한지 14년 만에 명종의 사위인 하동(河東)절도사 석경당(石敬瑭)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후당의 말제(
“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평범하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조광윤(趙匡胤)은 큰 꿈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이었지만,결코 현실에 순응하거나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한 마리 작은 새가 아니라,위엄 있게 높이 올라 하늘을 제압하는 대붕(大鵬)이 되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그것은 기득권층이 두터운 진입장벽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과연 믿을 데라고는 없는 우리의 주인공 조광윤이 어떻게 사회에 진출하여,어떤 과정을 거쳐 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황제까지 되었는지 조명해 본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에는 명군(名君)이 여러 명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단연 돋보인다. 송태조 조광윤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마찬가지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어지럽던 세상을 통일하고 백성을 안정시켜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조광윤은 송나라가 319년 동안 존속할 수 있는 기틀을 굳게 다지고 찬란한 문치(文治)국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