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평범하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조광윤(趙匡胤)은 큰 꿈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이었지만,결코 현실에 순응하거나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한 마리 작은 새가 아니라,위엄 있게 높이 올라 하늘을 제압하는 대붕(大鵬)이 되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그것은 기득권층이 두터운 진입장벽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과연 믿을 데라고는 없는 우리의 주인공 조광윤이 어떻게 사회에 진출하여,어떤 과정을 거쳐 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황제까지 되었는지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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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대 황제 중에는 명군(名君)이 여러 명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단연 돋보인다. 송태조 조광윤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마찬가지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어지럽던 세상을 통일하고 백성을 안정시켜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조광윤은 송나라가 319년 동안 존속할 수 있는 기틀을 굳게 다지고 찬란한 문치(文治)국가를 이룩했던 뛰어난 국가경영의 CEO(Chief Executive Officer) 즉, 경세가(經世家)일 뿐만 아니라,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적의 용장이었다. 봉건전제시대의 황제로서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경세론(經世論)과 후덕한 인품을 갖추고 서민과 다름없는 질박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그를 따를 황제가 없다. 근래 중국정부에서 송태조 조광윤을 기념하기 위해 ‘100위안(元)’ 짜리 금화(金貨)까지 발행한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당(唐)나라가 907년에 망하고 군소국가(群小國家)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패권을 다투던 ‘오대십국(五代十國)’시기는 ‘혼돈(混沌)의 시대’로 전쟁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은 전란(戰亂)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았던 암울한 시대였다.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는 말이 있듯이, ‘영웅 조광윤’은 혜성같이 나타나 난세를 종식시키고 신음하던 세상을 구했다. 조광윤은 나라의 법과 제도를 바로 잡은 바탕 위에 지난날의 역사적 폐단이었던 무인(武人)통치시대를 마감하고 문치시대를 열어 풍요로운 가운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가 세운 송나라를 당나라와 더불어 태평성세를 일컫는 ‘당송시대(唐宋時代)’라고 불렀던 것이다.
조광윤이 중국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왕건(王建)이 후삼국시대를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조광윤과 왕건은 쪼개졌던 나라를 통일해 세상을 안정시키고 발호했던 무인과 호족(豪族) 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해 문치(文治)시대를 열었던 점이 비슷하다. 조광윤과 비슷한 나이로 같은 시기에 재위했던 고려의 임금은 광종(光宗) 왕소(王昭)이다. 고려와 송나라는 각기 건국초기 962년(태조3, 광종13)에 국교를 시작하고 선린관계를 유지하여 송태종(宋太宗)이 북한(北漢)과 거란을 공격할 때 고려가 지원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광종은 송태조의 연호 ‘건덕(乾德)’을 쓰기도 했다. 고려와 송나라는 모두 거란(契丹)과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거란의 압력으로 고려는 송나라와 일시 외교관계를 단절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송나라의 선진문명을 존중하고 내심 거란을 야만족이라고 얕보았기 때문에 송나라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또 역사적으로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 중에서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은 왕조는 송나라와 명나라뿐이며, 후일 고려의 안향(安珦)은 남송으로부터 유교(儒敎)의 정수인 주자학(朱子學)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송태종 조광의(趙光義)의 핍박을 받았던 송태조 조광윤의 직계 후손 중 일부가 고려로 망명하여 배천조씨(白川趙氏)와 임천조씨(林川趙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