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려한 비상(飛翔)을 위한 용틀임 <03>

제1절 조광윤 출생 당시의 시대상황 (02)

이존욱은 제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양자(養子) 이사원(李嗣源)의 반란으로 궁내에서 내응하던 연극배우 출신의 지휘사 곽종겸(郭從謙)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사원은 926년 명종(明宗)으로 즉위했는데, 오대시기의 14명의 황제 중에서 후주(後周)의 세종 시영(柴榮)과 함께 명군(名君)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 이유는 오대십국시대가 시작된 이후 20년 동안 수없는 전쟁과 살생이 계속되었는데, 명종은 전쟁을 멈추고 농업생산에 주력하여 몇 년간 풍년이 들어 혼란한 시기에 모처럼 6-7년간의 안정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종으로부터 황위를 빼앗은 명종이 장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조홍은을 달갑게 볼 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그는 ‘축출된 황제의 측근’으로 분류되어버린 것이다. 명종은 그를 금군에서 내쫓지는 않았지만 냉대하여 가정형편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927년 조광윤은 낙양 근교의 군영 협마영(夾馬營)에서 고고한 첫울음을 터뜨렸다.

명종 이후 형제간의 권력다툼으로 후당은 불과 건국한지 14년 만에 명종의 사위인 하동(河東)절도사 석경당(石敬瑭)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후당의 말제(末帝) 이종가(李從珂)는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에 실패하자 옥새를 안고 현무루(玄武樓)에 올라 분신(焚身)자결했다. 석경당은 사타족 출신으로 거란(契丹)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의 도움을 받아 937년 오대(五代)의 세번째 왕조 후진(後晋)을 세웠다. 후진의 고조(高祖)가 된 석경당은 거란에게 약속한대로 북방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떼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신하의 나라’로 낮추고, 거란을 ‘아버지 나라’로 섬기며 매년 비단 30만 필과 많은 공물을 바쳤다. 이때 석경당은 수도를 낙양에서 후량의 수도였던 변경(汴京)으로 다시 옮겼다. 조홍은은 그대로 후진의 금군 무장으로 남게 되어, 11세의 소년 조광윤은 어린 시절 정들었던 낙양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 변경(汴京)으로 이사하였다.

 

석경당이 재위한지 6년 만에 병사한 후, 그의 양자 석중귀(石重貴)가 거란의 동의 없이 황제에 즉위하고 더 이상 ‘신하의 나라’임을 인정하지 않자, 거란태종 야율덕광이 불경(不敬)하다는 이유로 946년 12월 후진을 침략하여 도성 변경(汴京)을 함락했다. 947년 1월, 후진의 출제(出帝) 석중귀가 항복하고 평복 차림으로 성문을 나가 야율덕광의 입성을 맞이했다. 거란왕이 변경에 입성하자 백성들은 두려워서 모두 달아났다. 그러자 거란왕은 성루에 올라가 이렇게 외쳤다.
「나도 사람이다.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들의 평안한 삶을 보장하겠다.」
해질 무렵에 거란왕은 도성 변경에서 물러나 성 밖의 적강(赤岡)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변경에 살고 있던 조광윤의 가족들도 후진의 무장 집안이었기 때문에 참변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다행히 거란왕이 군사를 성 밖으로 물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로써 후진은 석경당이 건국한지 불과 1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947년 후진을 항복시킨 거란은 중국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다시 본거지인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로 인해 중원에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 틈을 타서 후진의 하동(河東)절도사로 있던 사타족 출신 유지원(劉知遠)이 947년 2월 태원(太原)에서 황제라 칭하고 변경으로 남하하여 후한(後漢)을 세웠으니, 이는 오대의 네 번째 왕조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후한의 고조(高祖) 유지원은 북쪽의 진양(晋陽)에서 남하하여 칼에 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변경에 입성했다고 한다. 입성 후 유지원은 후진의 모든 관리들이 원래의 직책에 그대로 있도록 하고, 수도도 그대로 변경(汴京)으로 한다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이리하여 조홍은은 계속 후한 금군의 무장으로 남게 되었다.

 

이 때 조광윤은 이미 21세의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고, 2년 전(945년)에 결혼까지 했다. 그가 출생하여 청년으로 성장한 20년 동안 왕조가 세 번이나 바뀌고 다섯 명의 황제가 바뀌었으나, 다행히 큰 전쟁이 없었다. 그래서 조광윤의 가족들도 무사할 수 있었으며,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귀중한 20년 동안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중국역사를 크게 바꿀 한 위대한 영웅이 성장했던 것이다. 청년 조광윤은 성격이 과묵한 편이었지만 활달하고 승부심이 강했다. 어머니 두씨(杜氏)의 지극한 관심 아래 한창 말썽을 피울 나이의 한 소년이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고 전도양양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조광윤은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힘찬 날갯짓을 하는 독수리처럼 저 먼 세상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