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5) ▶ 10배의 남당군(南唐軍)을 무찌른 육합진(六合鎭) 전투 조광윤이 육합진에서 한영곤의 패잔병들에게 선엄후교의 지략으로 분발심을 일으켜 양주성을 도로 찾는 데는 성공했으나, 뜻밖에 남당의 이경달이 정예군 2만 명을 이끌고 과보(瓜步)에서 장강을 건너 육합진으로 돌진해왔다. 이때 육합진에 주둔하고 있던 조광윤의 병사는 군법을 집행하러온 2천 명 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아군보다 10배가 넘는 남당군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 남당정예군이 회남전장에 진입하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되리라는 것을 조광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 모른 채 용맹한 정신을 발휘하여 다시 한 번 10배가 넘는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당의 이경달은 육합진에 후주군이 주둔해 있는 것을 보고도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그는 육합진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세우고 병마를 포진해 후주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이경달이 진공에서 방어로 전술을 바꾸자 승전의 자신감이 생긴 조광윤의 장병들은 이구동성으로 주동전(主動戰)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우수한 군사전략가는 침착해야 하고 전쟁을 지휘할 때 절대로 부하들의 비이성적 출전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4) 4. 육합진전투(六合鎭戰鬪) ▶ 선엄후교(先嚴後敎)의 육합진(六合鎭) 이야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동(主動)을 쟁취하는 것이다. 조광윤은 항상 주동을 쟁취했기 때문에 매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남당왕 이경(李璟)은 후주에 사자를 보내 많은 재물을 헌납하며 휴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종의 목적은 남당의 강북지역을 전부 회수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는 휴전요청에 불응하고 오히려 진공하도록 군사를 독려했다. 휴전요청이 무산되자 남당왕은 저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세종은 계속 수주를 포위하는 한편, 강북의 요충지 양주(揚州)의 병력이 적은 틈을 노려 한영곤(韓令坤)을 시켜 양주를 공격하게 하여 단숨에 양주를 점령했다. 후주군이 수도 금릉의 안전을 직접 위협하자 남당왕은 제왕(齊王) 이경달(李景達)을 원수(元帥)로 내세우고 정예병 6만 명을 선발하여 강북에 가서 후주군과 싸우도록 명했다. 956년 4월초, 남당의 우위장군(右衛將軍) 육맹준(陸孟俊)이 상주(常州)에서 1만여 명을 이끌고 태주(泰州)를 공격하여 수복한 후 이어서 양주를 공격했다. 남당군의 맹렬한 기세에 눌린 한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3)3. 전쟁사에 길이 빛나는 저주대첩(滁州大捷) 조광윤이 통솔하는 군사들의 청류관 기습의 성공으로 남당의 대군은 모두 저주성으로 후퇴했다. 저주성을 사수하고 있는 남당군을 철저히 소멸하기 위해 조광윤은 또다시 병사를 이끌고 물을 건너 저주성 밑까지 추격했다. 이때 저주성으로 후퇴한 남당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조광윤의 용맹함에 떨고 있었다. 남당의 대장군 황보휘는 백전노장으로서 조광윤의 기습에 의해 패배를 당했으니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광윤의 군대가 성 밑에 추격해오자 그는 성루에 올라가 조광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남몰래 돌연 습격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싸우려면 진을 치고 광명정대하게 싸워야 하지 않겠나? 무장이라는 이름에 치욕을 줄 순 없다. 그대가 성을 공격하려 하니 내가 성 밖에 나가서 각자 진을 친 다음 다시 한판 붙도록 하자!」 황보휘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가련할 정도로 적은 숫자의 후주군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이에 병법을 잘 아는 조광윤은 일단 황보휘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이고 성 밖에 나와 진을 치도록 했다. 황보휘가 성 밖으로 나온 것을 본 순간 조광윤은 그가 미처 진을 치기도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2)2. 허장성세로 20배의 남당군을 무찌른 청류관전투(淸流關戰鬪) 『주역(周易)』에서는 “재능을 품고 있어도 그것을 뽐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군주를 보좌하게 되면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하고 공을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조광윤이 바로 그와 같았다. 과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자기 공으로 돌리지 않고 묵묵히 세종을 따라 계속 남하했다. 956년 2월 2일 후주군은 하채(下蔡)에 부교를 설치했는데, 조광윤은 세종을 수행해 시찰에 나섰다. 이 부교에 의지해 후주군이 회하 남안에서 남당군과 작전하면 크게 유리 할 것 같았다. 수주를 에워싸고 있는 후주군은 유인첨이 한사코 항복하지 않아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주 동쪽의 저주(滁州)에서는 황보휘와 요봉(姚鳳)이 10만 대군을 통솔해 수주와 호응하고 있었다. 저주에 있는 청류관(淸流關)은 남쪽으로 장강(長江)을 지키고 북쪽으로 회수를 통제하는 군사요충지이다. 청류관에 주둔하고 있는 황보휘와 요봉은 산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진지를 엄수하고 있었다. 수주를 계속 함락하지 못하자 세종은 또다시 천하무적의 명장 조광윤에게 저주(滁州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1)1. 유인책을 써서 4배의 적군을 물리친 과구전투(渦口戰鬪) 조광윤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건의로 후촉 4개 주를 빼앗은 후주 세종은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956년 1월 남당의 회남(淮南)지역으로 출정했다. 세종이 아끼는 심복으로서 조광윤은 그를 수행해 회남전선으로 갔다. 세종은 시위도지휘사 이중진에게 정양(正陽)으로 진군하고, 하양절도사 백중찬은 영상(穎上)에 주둔하도록 명했다. 이중진은 오래 동안 수주(壽州)를 진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남당의 유언정(劉彦貞)은 구원병을 이끌고 수주에서 2백리 떨어져 있는 곳에 당도했고 또 수백 척의 전투함대를 정양으로 파견함으로써 후주가 수축한 부교(浮橋)를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세종은 진주(陳州)에 당도하자, 즉시 이중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회하(淮河)지역으로 급히 달려가 유언정 군대와 대항하도록 했다. 이중진의 후주군은 유언정을 사살하고 남당군을 대파했다. 후주군은 맹공을 퍼붓고 끝까지 추격해 남당군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때 후주의 주장 이곡(李谷)이 공격계획을 늦추자는 방안을 세종에게 상주했는데 그는 매우 불
제4절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후촉(後蜀)과의 전쟁 (02)조광윤은 또 왕경의 군사와 후촉의 군사역량을 비교분석했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후촉군은 약해서 공격하면 곧 무너질 것으로 보였다. 후촉의 지원군인 이정규의 군사도 왕경의 군사에 비해 약했다. 그나마 병력을 분산시켜 이곳저곳을 방어하고 있었다. 양군(兩軍)을 비교해 보면 왕경의 군대가 더 강하고 승전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한 지리적 환경에 근거해 왕경과 작전계획을 상의했다. 봉주(鳳州)는 4개 주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므로 4개 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먼저 봉주를 탈취하면 자연 4개 주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고, 진주(秦州)는 남쪽 3개 주의 지원을 잃게 된다. 그러면 진주의 수비군은 공포에 떨게 되고 투지를 상실하여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진주와 봉주가 무너지면 성주(成州)와 계주(階州)는 더 이상 방어할 수 없게 되고 병사들은 성을 팽개치고 도주할 것이 뻔했다. 조광윤은 서부전선을 시찰한 후, 후촉의 4개 주는 곧 정복이 가능할 것으로 아무런 사심이나 편견 없이 조정에 보고했다. 세종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진격명령을 하달했다. 후주 대장군 왕경은
제3절 후주군(後周軍) 정예화의 주역(主役) (02)과거 전통에 따라 후주에서는 황제가 출정할 때에는 변경(汴京)에 주둔하고 있는 위수부대(衛戍部隊)인 금군(禁軍)을 통솔하게 된다. 금군은 전전사(殿前司), 시위친군마군사(侍衛親軍馬軍司), 시위친군보군사(侍衛親軍步軍司) 등 3개 부대로 나눠지는데, 방대한 병력을 지닌 금군은 수도 방위임무를 수행하게 되므로 황제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북한왕 유숭에 대한 출정을 거친 세종은 중대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군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군대정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세종은 처리해야 할 정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 군대정비의 중대사를 고평전투에서 용맹과 지략을 떨친 전전도우후(殿前都虞侯)로 갓 승진한 조광윤에게 맡기기로 했다. 군대 정비와 개혁의 모든 결정권은 조광윤에게 있었던 만큼 장군과 병사들의 선발여부는 그가 직접 결정했다. 말단 병사로부터 도우후 이하의 각급 장군을 맡은 경험이 있는 조광윤은 오대(五代)시기의 군대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로는 당시 후주의 군대는 노병과 소년병들로 구성되어 군대구실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여러 번 패전의
제3절 후주군(後周軍) 정예화의 주역(主役) (01)고평전투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듯이, 조광윤은 전쟁터에서 작전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하를 다스리는 통솔능력도 있었다. 그는 군대는 반드시 행동이 일치하고 규율이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평전투에서 후주군이 대승을 거두게 되자 조정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감행했던 세종의 위신은 크게 올라갔고 조광윤의 지위도 견고해졌다. 그러나 고평전투는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시켰다. 첫째는 노장 번애능과 하휘가 적군의 기세에 눌려 군사를 끌고 도주하는 바람에 전군(全軍)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었다. 둘째는 군기가 문란하고 북한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하는가 하면 잔학한 짓을 했던 점이었다. 고평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세종은 승세를 타고 북한의 수도 태원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당시 형세로는 후주가 아주 유리했다. 세종이 대군을 이끌고 도성 태원성을 겹겹이 포위하자 그 기세에 눌려 북한의 각 주현(州縣)이 분분히 항복했다. 그러나 군량공급이 끊기자 많은 후주병사들이 당장 급한 군량문제를 해결하려고 북한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하는 바람에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항복했던 북한의 주현들도 다시 태도
제2절 맹장으로서 위용을 보여준 첫 전투 ‘고평전투(高平戰鬪)’954년 1월 1일, 시영(柴榮)이 후주의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 북한왕(北漢王) 유숭(劉崇)은 곽위가 자기 형 유지원(劉知遠)이 세운 후한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원수 갚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숭은 곽위가 죽고 세종이 즉위해 국상(國喪)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후주를 멸망시킬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거란과 연합해 대거 침공했다. 이때 거란은 양곤(楊袞)을 파견해 1만여 기마부대를 이끌고 북한(北漢: 951~979)을 돕도록 하고, 유숭은 3만 병사를 출동시켜 장원휘(張元徽)를 선봉장으로 삼아 남하했다. 이 소식이 변경(汴京)에 전해지자 후주 조정은 온통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세종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해 대책을 강구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기로 한다. 그러자 풍도(馮道)를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극구 반대했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고 국상까지 치러서 나라가 안정되지 않아 민심이 흔들리기 쉬운 상황에서 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4세의 혈기방장한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로서 받은 치욕은 잊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찾아온 적은 물리쳐야 한다.
제1절 용(龍)이 물을 만나다 (01)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듯이“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앞날이 달라지는 법이다.”조광윤의 출발은 비록 미미하였지만,그는 후일 황제가 될 곽위(郭威)와 시영(柴榮)이라는두 영웅을 만났다.조광윤이 그들을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지만 그들을 만났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성공하지는 못했다.과연 조광윤은 어떻게 하여 말단병사로 군에 입대하여10년이 채 안된34세 때 후주군(後周軍)최고사령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을까? 조광윤은 떠돌이시절 어느 절에서 만난 노승이 “북쪽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북쪽에서 싸우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가 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최소한 아버지만큼은 절대로 문전박대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장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2세에 집을 떠난 조광윤이 서쪽의 관서(關西)와 호북(湖北) 지방을 2년 동안 떠돌면서 숱한 문전박대와 고생을 경험한 끝에 24세가 되던 950년(후한 은제 말년)에 그의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후한의 추밀사이며 대장군인 곽위 부대의 군사모집에 응모하여 말단 병사로나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