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쌍의 맹장(猛將) <07>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1)

1. 유인책을 써서 4배의 적군을 물리친 과구전투(渦口戰鬪)

조광윤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건의로 후촉 4개 주를 빼앗은 후주 세종은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956년 1월 남당의 회남(淮南)지역으로 출정했다. 세종이 아끼는 심복으로서 조광윤은 그를 수행해 회남전선으로 갔다.
 
세종은 시위도지휘사 이중진에게 정양(正陽)으로 진군하고, 하양절도사 백중찬은 영상(穎上)에 주둔하도록 명했다. 이중진은 오래 동안 수주(壽州)를 진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남당의 유언정(劉彦貞)은 구원병을 이끌고 수주에서 2백리 떨어져 있는 곳에 당도했고 또 수백 척의 전투함대를 정양으로 파견함으로써 후주가 수축한 부교(浮橋)를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세종은 진주(陳州)에 당도하자, 즉시 이중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회하(淮河)지역으로 급히 달려가 유언정 군대와 대항하도록 했다. 이중진의 후주군은 유언정을 사살하고 남당군을 대파했다. 후주군은 맹공을 퍼붓고 끝까지 추격해 남당군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때 후주의 주장 이곡(李谷)이 공격계획을 늦추자는 방안을 세종에게 상주했는데 그는 매우 불쾌했다. 세종은 과감한 진격방침을 세우는 한편, 주장(主將)을 이곡에서 이중진으로 바꾸어 전군을 통솔하도록 했다. 956년 1월 22일, 세종이 수주성(壽州城) 밑에 당도해 이튿날부터 주야로 수주성을 공격했다. 수주가 위급해지자 남당도 1만여 명을 증원하고, 함대는 회하에 정박시키고 도산(塗山) 밑에 군영을 세웠다. 또 서주(徐州)에서 후퇴한 황보휘(皇甫暉)부대와 합류하여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후주군에 대한 반포위망(反包圍網)을 형성했다. 그리고 남당의 명장 유인첨(劉仁瞻)이 수주성을 완고히 고수하고 있어 한동안 전황은 대치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세종은 교착상태를 하루 빨리 타개하고 싶었으나 장수들로부터는 아무런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은 또다시 난국타결의 해결사인 조광윤에게 출격명령을 내렸다. 당시의 형세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던 조광윤은 5천 병마를 이끌고 도산과 회하에 있는 남당군을 소탕하려 했다. 그런데 남당 수륙대군의 병력은 2만 명으로 조광윤의 병사보다 4배나 많았다. 남당군은 목숨을 걸고 성을 사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공보다는 지략으로 탈취해야 했다. 그는 유인책(誘引策)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광윤은 먼저 기마병을 출동시켜 남당진영에 강공을 퍼붓다가 겁이 난 것처럼 서쪽으로 쫓기듯 도망치도록 지시했다.

그는 과구(渦口)에 복병을 매복시키고 때를 기다렸다. 남당군은 과연 조광윤의 계략에 넘어갔다. 수적으로 훨씬 적은 후주군이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한다고 여긴 남당군은 일제히 출병하여 후주군을 추격했다. 남당 추격병이 매복진에 진입하자 조광윤은 즉각 군사를 출격시켜 맹공을 퍼부었다. 그 결과 남당군은 과구에서 대패했다. 조광윤이 이끄는 후주군은 남당 병마도감 하연석(河延錫)을 죽이고 함대 50여척을 노획했다. 그 결과 수주 북쪽으로부터 오는 남당군의 위협을 제거하고 남당의 반(反)포위망을 분쇄했다. 그리하여 수주 동쪽 저주(滁州)에 있는 남당군이 서로 협조할 수 없게 하고, 남당의 회남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후주의 군사행동이 대규모로 전개될 수 있도록 어려운 전국(戰局)을 타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