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지오그래픽지에 등장한 관음백불▲옥천암 마애불이 있는 보도각 전경<사진= 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미국 국립지리학회가 1888년 창간한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1910년부터 칼러 사진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1910년은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이 상실된(8월29일) ‘경술국치’의 해이다. 당시에 선교사등 많은 서양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인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가인 월리엄 채핀이란 사람이 서울여행에서 찍은 사진중 백불로 된 ‘마애불’ 사진이 있었는데 바로 ‘옥천암마애보살좌상’이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바로 1910년 11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지에 칼라사진으로 게재하였다. 사진을 보니 물이 흐르는 홍제천변의 보도각안에 백불로 보이는 마애보살좌상이 있으며 그 앞을 벙거지를 쓴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끌며 지나가고 있다. 아마 이것이 컬러사진으로 외국에 소개된 최초의 마애불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구한말을 전후하여 서울에 왔던 서양인들에겐 우리나라의 풍경이나 사회상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져 셔터를 눌렀으리라. 내가 라오스의 오지마을에서 우리나라 60년대의 생활상이나 다름 없는 그들의 생활상과 풍경을 담았
중국과의 바닷길을 지키는 수호신▲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사진= 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교수님 저의 마을 뒷산에도 부처 그림이 새겨져 있는 큰 바위가 있는데유’ 대학에서 ‘서산 마애삼존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의 일화는 한국 미술사학자 정영호(1934~2017. 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 겸 석좌교수) 박사가 들려준 것으로 내가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문화관광해설사 고종남씨에게 들은 얘기다. 그 말을 들은 조사팀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환희와 기대속에 단숨에 달려간 그들은 태안시장에서 짜장으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험한 길을 40분여를 올라가 태을동천 맞은편에 17도 정도 기울어진 삼각형의 큰 바위에 빗물을 피하기 위해 사각으로 판 감실안에 서 있는 마애불을 친견했었으니 그 때가 1960년대 초였다. 그 후 마애삼존불입상은 1966년에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으며 불상 하체 부분과 연화대좌를 덮고 있던 토사를 걷어 내고, 재정비를 하여 전신이 드러난 완전한 모습을 갖추면서 학술적 조사 및 연구와 고증을 거치고 태안군의 품의로 '서산 용현리 마
▲1일 서울 조올구 관철동의 한 중구서점 외벽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 아내 김건희씨를 비방하는 내용의 벽화가 그려진 가운데 문구에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현재는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사진=김재필 기자)2021.8.2/시사1 (시사1 = 김재필 기자)서울 종로 한복판에 등장한 쥴리 벽화가 가로20미터 세로 2.2미터의 크기의 커다란 건물 옆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쥴리의꿈, 영부인의꿈, 쥴리의 남자들)문구가 지워져 있다. 글씨 위에 검은색으로 칠해진 상태다.
화랑들의 정신적 지주와 호국불교의 도량처▲북면의 삼존불 및 반가사유상<사진= 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단석산 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 199호) 진달래가 산간을 점점히 선홍빛으로 물들이던 계절에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3번째로 신라인들의 불국토인 경주를 찾았다. 경주에 있는 토함산(吐含山), 금강산(金剛山), 함월산(含月山), 선도산仙桃山)과 함께 신라인들이 신성시 한 경주 오악(五嶽)중의 중악(中嶽)으로 불리는 해발 827.2m 높이의 단석산(斷石山)에 위치한 신선사마애불상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 산은 경주 시내를 벗어난 건천읍과 산내면에 걸쳐 있어 삼국의 영토분쟁이 치열할 때 백제군들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과 청도를 거쳐 경주로 쳐들어왔던 길목으로 원래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으로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 산에서 수련했던 곳이라 한다. ‘삼국사지’와 ‘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등에 의하면 가야국 김수로왕의 13대 후손인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 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목욕재계 하고 고구려와 백제와 말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자 4일 만에 난승(難勝)이라는 한 노
▲<사진= 김재필 기자>(시사1 = 김재필 기자)연일 이어지는 폭염에도 참새목 휘파람새과에 속하는 '개개비'가 경남 주남지 연꽃단지에서 "한 여름 아침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강화 보문사 마애석불(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9호)▲마애불석불에 새겨진 눈섭바위 위로 비천상과 같은 구름이 날고 있다.<사진= 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강화도엔 갯벌과 철새, 돈대와 유서 깊은 사찰, 근대적 교회 건물등 자연과 인공적인 볼 거리들이 많아 나는 자주 강화를 찾는다. 올해에도 유례없는 역병(코로나19)을 피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염을 이고 나문재나물이 붉은 양탄자처럼 깔린 석모도 갯벌을 지나 보문사를 찾았다. 강화도에서 유일한 커다란 마애불은 만나기 위함이었다. 동해의 양양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관음도량으로 알려진 서해에 있는 ‘보문사 마애석불좌상’은 강화군 석모도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 이름을 딴 낙가산(해발 235m)에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635년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 이곳에 와 창건했다는 보문사의 극락보전 우측 419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눈썹바위가 나를 압도 한다. 마애불은 이 눈썹바위에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 주지인 이화응 스님이 마애불 밑그림을 그리고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의 주도하에 후원금과 불자들의 보시로 높이 9.2m 너비
과천 용운암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과천시 향토유적 제 4호)▲과천 용운암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과천시 향토유적 제 4호)<사진 =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우리나라의 마애상(磨崖像)은 대부분이 부처나 보살을 주 대상으로 조성됐다. 과천 정부종합청사내 기술표준원 옆의 작은 길로 진입하면 250여m 거리에 등산로를 가운데로 양옆으로 두 개의 바위 중 높이 1.8m, 폭 2m 정도 되는 왼쪽 바위에 5명의 스님얼굴(僧容)만을 입체감 있게 조각되어 1,000년동안 길가는 사람들을 웃음으로 맞이 해 주는 마애상이 있다. 바위 상단에 정면으로 2명 측면으로 1명, 하단에 정면과 측면으로 각각 1명씩인데 투박하고 서투른 솜씨지만 모두 익살스럽고 잔잔한 미소를 띤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헌데 무슨 사유로 부처나 보살이 아닌 스님들의 얼굴만 한 곳에 새겼을까? 안내판에 따르면 명칭이 “용운암마애승용군” 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없어진 옛 암자인 용운암의 스님들이 행사를 마치고 어느 스님의 제안으로 5명이 한자리에 모인 걸 기념하기 위해, 아니면 암자가 없어지는 아쉬움에 요즘 유행하는 인증샷 찍듯 바위에 얼굴을 새겼는지도 모른다.
▲저어새의 먹이활동<사진=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저어라~ 그러면 잡힐 것이다. 주걱처럼 생긴 부리로 개천이나 바다의 얕은 물속을 휘휘 저어서 먹이(물고기나 게등)를 잡아 먹는 다해서 ‘저어새’라 불리는 천연기념물205호로 지정된(1968.5.31.) 일급 멸종위기 귀한 철새가 폭염이 이어지는 7월초에 강화도 창후항에서 카메라에 포착 되었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 981호)▲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 981호)<사진=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고려가 자주국임을 천명했던 고려황제의 만세를 염원한 마애불 - 코로나19가 좀 뜸해진 여름초입에 올림픽대교를 건너 하남방향으로 30여분 달려 네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하남시 교산동에 위치한 선법사를 찾았다. 절집 마당에 들어서니 오른쪽 앞쪽에 백제의 온조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깃든 작은 샘인 ‘온조왕 어용샘’과 작은 폭포 옆에 위치한 2m 정도 크기의 편마암인 삼각형 바위에 선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조각 작품인 ‘마애약사여래좌상’이 단아하면서 절제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앞면을 자세히 보니 다른 마애불에서 보지 못했던 점점이 정으로 쪼은 작은 점들이 보인다. 그렇다! 1884년 5월에 점묘법을 처음 작업에 도입하여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을 그려 화제를 불려 모았던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의 점묘법보다 무려 1,000여년이 앞선 기법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선조들의 예술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로 51 cm 세로 94
▲근정전 앞을 지키는 수문군<사진 =김재필 기자> (시사1 = 김재필 기자)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궁궐지기는 장마철에 어떤 복장을 했을까? 당시 군사들의 우장(雨裝)은 처네형과 방령형 2겹의 '유삼'과 '지삿갓' '갈모' 2종의 모자를 썻는데 수문장은 2종의 유삼을 입고 지삿갓을 썻으며, 수문군은 처네형 유삼과 갈모를 쓴 우장(雨裝)을 갖추고 경비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