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 같던 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어린 공제(恭帝)가 등극하자, 장서기(掌書記) 조보(趙普)는 군심(軍心)과 민심(民心) 그리고 재상 왕부(王傅)와 위인포(魏仁浦) 등 조정대신들이 모두 조광윤의 황제옹립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정세동향을 조광윤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그는 조심스레 조광윤의 표정을 살피면서 의중을 떠보았지만, 신의를 중시하는 조광윤은 세종이 자신을 그토록 신뢰했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일축해버렸다.
사려 깊은 조보는 더 이상 조광윤에게 황위를 빼앗자는 간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폭풍처럼 밀려오는 시대흐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깊이 고민했다. 세상의 황제옹립 분위기에 순응하려면 우선 당사자인 조광윤 자신이 이를 허락하는 것이 선결과제인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이를 무리하게 강행한다면 선의의 조광윤을 엄청난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가 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차례 거친 피바람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외면한다면, 또 다른 야심가가 황제의 자리를 선점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보는 이 심각한 운명적 과제를 끌어안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조광윤에게 참모가 많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역량이 있는 사람은 조보 그 자신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비록 나이는 스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총명한데다 침착하고 속이 깊으며 야심만만한 사나이, 바로 조광윤의 아우 조광의(趙光義)였다. 신중한 조보는 황제를 옹립하는 일은 감히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드러내놓고 떠벌일 성격의 사안이 아니므로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비밀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조광의를 생각해 내니 조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조보는 공봉관(供奉官)으로 있는 조광의를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장서기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르시지 않고... 」
조광의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차 좀 한잔 얻어 마시려고요. 허허...」
눈치 빠르고 총명한 조광의는 짐짓 모른 체하면서 아끼던 차를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조보는 찻잔을 들면서 천천히 말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들어보려고요...」
조광의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귀덕부(歸德府)로는 언제 떠나지요?」
조보가 답했다.
「이제 떠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때 조광의가 그에게 물었다.
「요즘 형님 심기는 어떠하신가요?」
조보가 말했다.
「형님은 아시다시피 세상의 흐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 걱정만 하고 계십니다만...」
이에 조광의가 맞장구를 쳤다.
「형님은 원래 그런 분이잖아요. 잘 아시면서…….」
조보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아무래도 어떠한 경우가 닥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조광의가 말했다.
「저는 장서기(掌書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리하여 조보와 조광의는 조광윤의 반대를 우려하여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측근의 이처운, 여여경, 묘훈 등 문신과 석수신, 왕심기 등 의사십형제의 무장들과 치밀한 물밑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