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4. 각 분야의 명신(名臣)들 ▶ 문무겸전의 청렴 강직한 관리 조빈(曹彬) 조빈은 강직한 청백리로 글 읽기를 좋아한 문무겸전의 무장이었다. 그는 품성이 바르며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조광윤과 풍채나 성격 면에서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후당 때인 931년(명종6)에 태어나 조광윤보다 네 살이 적다. 조빈의 누나가 후주 태조 곽위의 황후가 되면서 그는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 세종 때 그는 공봉관(供奉官)이 되어 황제의 음식, 다과, 술 등을 관리했다. 당시 장군으로 있던 조광윤은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조빈을 찾아가서 술을 얻어 마셨다.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매번 조빈이 제공해 준 술은 모두 그가 시장에 가서 자신의 돈으로 사온 술이었다. 장군 조광윤은 조빈에게 물었다. 「당신이 술을 관리했기에 당신에게 좀 얻어 마시려 간 것인데 왜 시장에 가서 사다 주었소?」 조빈이 말했다. 「저는 술을 관리하는 관리인데 어떻게 사사로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조광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는 등극한 후 신하들과 후주 세종의 옛 신하들에 대해 언급할 때 감개무량한 듯 말했
오늘날 세계는 인구가 70억이 넘었지만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고, 산업기술은 급속히 전자화(電子化)되고 있다. 그만큼, 세상 보는 눈도 많아지고, 빨라지고, 다각화(多角化)되어 더 이상 틀에 박힌 견해나 시각은 있을 수 없고 100% 정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안 특히 정책에 대해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다. 왜냐 하면, 각기 다른 경험, 지식, 이익, 환경에 따라 다른 잣대와 색안경을 쓰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라의 앞날을 위해 어떤 비판이라도 감수하고 한마디 쓴 소리를 하고자 한다. 요즘, 한국은행의 통화(通貨)정책이 정치이슈화되고 있다. 지난 4월 총선 때 주요 정당에서 표를 의식한 통화의 양적 완화(QE: Quantitative Easing)를 주장했고, 급기야는 이에 정부도 동조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모든 사안이나 정책에는 일리(一理)가 있고, 명암(明暗)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명분을 보면 가관(可觀)이다. <한국은행법>을 개정하여 돈을 마구 찍어내서, 선박업을 비롯한 주요 부문의 기업구조조정을 하는데 쓰겠다는 얘기다. 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 기업부문이 국내기업간 과도한 헐값경쟁, 안일한 경영, 기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옛말에 “여인은 아름다우면 남의 질투를 사게 되고, 관리는 유능하면 남의 원망을 사게 된다.”고 했다. 만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조보에 대해 과실을 폭로해 공격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중상모략하는 자들도 있었다. 판대리사경(判大理寺卿) 뇌덕양(雷德骧)은 중서성(中書省) 관리들이 조보에게 의존하자, 그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중서성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형을 늘리거나 감형하는 것을 보고 탄핵상소문을 올려 “조보가 남의 집을 강제로 점유하고 재산을 축적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조보를 깊이 신임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조광윤은 오히려 그 상소문을 올린 사법관을 질책했다. 「솔방울에도 귀가 달렸겠소. 조보가 내 사직(社稷)의 신하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조광윤은 그 일로 뇌덕양의 판대리사경 직책을 해임하고 상주(商州)의 사호(司戶)로 좌천시켰다. 10년 동안 재상직에 있은 조보는 3년에 한 번씩 교체하는 송나라 관리제도 때문에 재상(宰相) 직을 면해 줄 것을 여러 번 황제에게 간청했다. 그를 누구보다도 나라의 보물로 여기고 있는 조광윤은 허락하지 않았다. 조보가 여러 번 간곡히 간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조보는 이렇게 말했다. 「관록을 먹고 있는 자들의 잘잘못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거나, 세력가의 비호가 있거나 승진과 파면이 무질서한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관직은 있으나마나 하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또 자주 바뀌고 교체되면 발전을 기할 수 없고 사람들은 안일을 꾀하게 된다.」 여기에서 조보는 이전에 관리에 대한 심사는 주(州), 현(縣) 두 곳만 해당되었고 중앙관리에 대해서는 심사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중앙관리에 대한 심사가 없었기 때문에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관직에만 있으면 국록을 받아먹었고, 조정의 일부 관직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능력 없는 자들이 머리 숫자만 채우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황제에게 무신(武臣)을 제외하고, 연말에 위로는 재상에서 아래로는 일반 관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관들에 대해 심사하도록 비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송태조 조광윤은 크게 찬성했다. 이로부터 조보는 ‘10년 재상’의 정치행보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관리의 심사과정에서 조보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체면을 봐 주지 않았으며 황실 가족과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이때부터 그는 다시 조광윤의 통일대업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책사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조광윤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경우 먼저 그에게 자문을 구함으로써 특별한 군신관계임을 보여 주었다. 어느 때인가 송태조 조광윤은 조보에게 이렇게 물었다. 「천하는 당말(唐末) 이래 전쟁이 그치지 않았소. 이제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위한 백년대계를 도모하려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소?」 이에 조보가 아뢰었다. 「폐하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하늘과 땅, 인간과 신(神)에게 다 축복이 될 것이옵니다. 옛부터 번진(藩鎭)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천하가 항상 불안정했습니다. 이제라도 절도사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식량과 금전적 규제를 가하며 그들의 정예군을 철수시킨다면 천하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광윤과 조보의 이번 대화는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대화 같았지만 사실상은 그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는 치국 명책(名策)이 바로 이 대화에서 결정된 것이다. 송태조가 등극한 지 거의 3년이 다 되어갈 무렵, 962년(태조3) 10월에 조보는 검교태보(檢校太保), 추밀사로 승진되어 재상과 대등한 위치에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959년 6월 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이 황제로 등극하자, 군심(軍心), 민심(民心), 조정대신들의 마음이 모두 조광윤의 황제옹립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세상의 인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정의 명에 따라 귀덕절도사로 훌쩍 떠나 버렸다. 그때 조보도 조광윤을 따라 귀덕부로 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는 조광의의 속셈을 떠본 후 그와 의기투합해 거사를 계획하기로 마음먹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드디어 960년 1월 1일 북한군이 거란과 연합해 침입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조정에서는 전전도점검인 조광윤이 이에 맞서 싸우도록 명을 내렸다. 조광윤이 조정의 명을 받고 북상해 적과 싸우러 갈 때 조보는 행장과 공문 꾸러미를 둘러메고 그를 따라 나섰다. 변경(汴京) 40리 밖의 진교역(陳橋驛)에 당도했을 때 군(軍)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기세등등한 장병들은 더 이상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한 조보는 조광의를 비롯한 참모들과 상의해 거사를 단행했다. 조광윤이 극구 사양했지만 어떤 장령이 황포를 어깨에 둘러주자 하는 수 없이, 장병들에게 살육을 엄금하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2. 조광윤의 평생측근 조보(趙普) 송태조 조광윤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단연 조보(趙普)다. 그는 천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온힘을 다해 계책을 짜내는 ‘지혜의 주머니’ 지낭(智囊)이었다. 조보는 조광윤이 후주의 장군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 후 진교병변을 치밀하게 계획해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했다. 또 송태조 조광윤과 송태종 조광의가 재위하던 시절 명재상으로서 크고 작은 정책에 그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보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평생 측근 위징(魏徵)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본향은 유주(幽州) 계현(薊縣)으로 922년 후량의 마지막 황제 말제(末帝) 때 낙양에서 태어났고 조광윤보다 다섯 살이 많다. 그는 박식하고 다재다능하며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난세에 태어난 그는 학식에 의한 출로를 찾지 못해 후주 세종이 즉위할 당시 영흥(永興)절도사 영흥(永興)절도사: 축사아장(竺沙雅章)의 <조광윤전(趙匡胤傳)>에서는 ‘기흥군(機興軍)절도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사(劉詞)의 참모로 있었다. 오래지 않아 유사가 죽기 직전에 세종에게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봉건제왕으로서 송태조 조광윤은 처세를 잘했고 또한 필요한 인재를 잘 기용했다. 이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영명한 정치가들의 공통된 점이다. 처세와 인재의 기용, 그리고 권력학(權力學)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처세를 잘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자는 곧 사람을 잘 쓸 줄 알고 권력을 이용할 줄 알므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조광윤의 처세와 사람을 쓰는 비결은 다름 아닌 ‘솔직 담백한 점’이었다. 조광윤의 성격에 대하여는 여러 역사 기록과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의 성격을 대략 종합해 보면, 총명하고 성품이 호방하고 활달했고(聰明豁達), 무예의 절정고수로서 명쾌한 결단력을 지녔으며(神武英斷), 인품이 너그러워 많은 이를 용서했고(寬仁多恕), 부모에게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으며(孝心友愛),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嗜酒私訪).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조광윤의 막부에는 자연히 현능한 인재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치밀하게 작전계획을 짜는 지략가 조보와 가시덤불을 헤쳐 선봉에서 돌진하는 유희고가 있었고, 선동을 잘하는 초소보
제3절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조광윤▶ 도서수집에 열성을 다하다 조광윤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고 도서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군시절 조광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면서도 군중에서 시간만 나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독서했고, 백성에게서 좋은 책을 발견하기만 하면 거금을 주고서라도 구입하곤 했다. 수레에 책만 싣고 귀성했던 조빈과 마찬가지로 그도 재물보다 책을 좋아하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 조광윤이 후주 세종을 따라 회남에 출정했을 때, 그가 수주(壽州)에서 사사로이 많은 재물을 챙겼다고 고발한 자가 있었다. 세종은 즉시 사람을 파견해 조광윤의 짐수레를 수사하게 했는데 발견한 것은 전부 책뿐이었다. 세종은 조광윤을 불러 물었다. 「경(卿)은 장수로서 갑옷을 입고 싸움만 하면 되는데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 많은 책을 소유한 것이오?」 조광윤은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뛰어난 지략이 없는 신(臣)은 항상 중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모으고 식견을 넓혀 지혜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독서에 있어서 세종은 도저히 조광윤을 따를 수가 없었다. 세종은 용병술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책 속에서 지략을 얻을 줄은 몰랐다. 독서
제3절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조광윤송태조 조광윤은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무예를 좋아하여 글 짓는 것은 귀족자제들이 즐기는 것으로 시간낭비라고 생각해 도외시했다. 그것은 돈 많고 시간 많은 귀족자제들이나 하는 사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역대 중국의 황제들과 비교해 볼 때 조광윤 자신이 쓴 글이 적다고는 하지만, 그는 남달리 독서를 좋아해 꾸준하게 무예를 익히면서도 유가경전과 병서(兵書) 등 역사서적을 탐독했다. 따라서 그는 늘 역사 경험 속에서 유익한 교훈을 섭취했다. 그리고 조광윤은 평소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으면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송나라 사람들은 문학을 숭상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송나라에 불후의 명작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宋代)는 진정 그들만이 지닐 수 있는 훌륭한 문화를 창조했다. 그들은 이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조광윤은 세 명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오경(五經)과 구경(九經)을 비롯한 유교경전과 역사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 중에서 그가 즐겨 읽었던 노자의 『도덕경』과 손무(孫武)의 『손자병법』은 그가 무장으로 있을 때나 황제가 되어서도 전략과 정책 수립에 유용하게 활용했을 뿐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