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19)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옛말에 “여인은 아름다우면 남의 질투를 사게 되고, 관리는 유능하면 남의 원망을 사게 된다.”고 했다.
만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조보에 대해 과실을 폭로해 공격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중상모략하는 자들도 있었다.
판대리사경(判大理寺卿) 뇌덕양(雷德骧)은 중서성(中書省) 관리들이 조보에게 의존하자, 그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중서성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형을 늘리거나 감형하는 것을 보고 탄핵상소문을 올려 “조보가 남의 집을 강제로 점유하고 재산을 축적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조보를 깊이 신임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조광윤은 오히려 그 상소문을 올린 사법관을 질책했다.
「솔방울에도 귀가 달렸겠소. 조보가 내 사직(社稷)의 신하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조광윤은 그 일로 뇌덕양의 판대리사경 직책을 해임하고 상주(商州)의 사호(司戶)로 좌천시켰다.

 

10년 동안 재상직에 있은 조보는 3년에 한 번씩 교체하는 송나라 관리제도 때문에 재상(宰相) 직을 면해 줄 것을 여러 번 황제에게 간청했다.
그를 누구보다도 나라의 보물로 여기고 있는 조광윤은 허락하지 않았다.
조보가 여러 번 간곡히 간청해서야 조광윤은 “재상으로 있는 동안 너무 과로한 것과, 또 별로 얻은 혜택도 없으며, 정치적으로 뭇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고려한 끝에 조보의 재상직을 면해 주고 그가 일하는 동시에 휴식도 취할 수 있도록 하양(河陽)절도사로 부임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다른 자료에서는 조광윤의 스승인 방주지주 신문열이 그곳에 있던 후주의 마지막 황제 시종훈을 굶어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보가 강력하게 신문열을 처형해야 한다고 간언하자 조광윤이 “그를 죽인다고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면서 그의 재상직을 파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조보는 태종(太宗) 때 다시 재상직을 맡게 되었다. 후일 조보는 송태종 조광의(趙光義)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신(臣)이 『논어』 한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반 권으로 태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으며, 나머지 반 권으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켰습니다. <臣有論語一部以半部佐太祖定天下 以半部佐陛下致太平>」

박식하고 다재다능하며 일처리가 똑똑하고 빈틈없는 조보가 조광윤을 보좌하여 세상을 다스리는데 어찌 『논어』에만 의존했겠는가? 그는 지혜가 출중하고 지략이 뛰어나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이론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3. 조광윤의 든든한 지원자 장영덕(張永德)

 

후주 조정에서 조광윤은 탁월한 군사전략으로 혁혁한 전공을 거두고 여러 번 세종이 직면한 위험을 타개했다.

그러나 그는 공을 세웠다고 해서 결코 교만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상관을 공경하고 동료들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전도점검 장영덕은 후주 태조 곽위의 사위이자 세종의 외사촌매부였다.

황제의 친척일 뿐만 아니라 경력이 풍부하고 명망이 높은 조정의 중신인 장영덕은 조광윤의 직속상관이었다.
조광윤과 장영덕은 비록 상하간의 관계이고 나이차이도 많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히 돈독했다. 조광윤과 장영덕의 친밀한 관계는 세종이 막 즉위했을 때부터 다져졌다.

고평전투에서 세종이 위험에 처하고 황제의 안위를 책임진 전전도지휘사 장영덕도 속수무책이었을 때 일개 장수에 불과했던 조광윤은 선뜻 나서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절묘한 작전전술을 제시해 난국을 타개하고 대승을 거두었는데도 몸을 낮추어 공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이를 눈여겨보고 마음에 기억한 장영덕은 이 청년장군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조광윤이 하씨부인이 죽고 왕씨부인과 결혼할 때와 동생 조광의가 부언경의 딸과 결혼할 때 돈이 없어 혼사치를 형편이 되지 않자, 장영덕은 이를 딱하게 여겨 두 사람의 결혼비용을 도와주었다.

 

후주의 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장영덕은 너그럽고 충직하여 충성심은 의심할 바 없었지만, 그의 부하이던 조광윤과 비교해 볼 때 경력과 관직을 빼고는 같이 논할 데가 없었다.

장영덕은 이중진과 사이가 나빴다. 회남출정 때 이중진이 주장(主將)이 되자 시기심이 발동한 장영덕은 이중진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하였다.
 
당시 조광윤은 전전도우후로서 전전도지휘사 장영덕의 부장(副將)으로 있었다. 장영덕과 이중진이 모순이 생기면 조광윤은 응당 상관인 장영덕의 편에서 말해야 했지만, 그는 두 사람의 갈등에 일체 개입하지 않고 장영덕을 도와서 옳거니 그르거니 한다든가 어떤 말을 살포해서 부채질하거나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군중에서 맡은 바 직책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진 부하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조광윤은 이중진의 수하로 있던 시위사호첩우상(侍衛司虎捷右廂)도지휘사 조언휘(趙彦徽)를 존경하는 선배로 대했다. 역시 이중진 부하인 시위사호첩좌상(侍衛司虎捷左廂) 도지휘사 장광한(張光翰)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후주 세종은 거란의 연운16주를 공략하다가 발병하여 어가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마침 경성에 돌아오자 세종은 “점검(點檢)이 천자가 된다.”는 말이 나돌자 그의 전전도점검직을 파면하고 그 자리에 조광윤을 등용했다.

장영덕은 말하기 좋아하는 반면, 주견이 없기 때문에 면직되고 조광윤은 자신을 잘 나타내지 않고 남의 말을 대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되었다. 누가 조광윤이 황제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했는가?

그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단련을 거쳐 성숙한 조건을 창조한 것이다. 한편,『송사』「장영덕전」에 의하면, 장영덕이 수양(睢陽)에서 “조광윤이 천명(天命)을 받을 것”이라고 한 서생의 예언을 전해 듣고 남몰래 그에 대해 알아보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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