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16)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959년 6월 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이 황제로 등극하자, 군심(軍心), 민심(民心), 조정대신들의 마음이 모두 조광윤의 황제옹립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세상의 인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정의 명에 따라 귀덕절도사로 훌쩍 떠나 버렸다.

그때 조보도 조광윤을 따라 귀덕부로 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는 조광의의 속셈을 떠본 후 그와 의기투합해 거사를 계획하기로 마음먹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드디어 960년 1월 1일 북한군이 거란과 연합해 침입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조정에서는 전전도점검인 조광윤이 이에 맞서 싸우도록 명을 내렸다.
조광윤이 조정의 명을 받고 북상해 적과 싸우러 갈 때 조보는 행장과 공문 꾸러미를 둘러메고 그를 따라 나섰다.
변경(汴京) 40리 밖의 진교역(陳橋驛)에 당도했을 때 군(軍)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기세등등한 장병들은 더 이상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한 조보는 조광의를 비롯한 참모들과 상의해 거사를 단행했다.
조광윤이 극구 사양했지만 어떤 장령이 황포를 어깨에 둘러주자 하는 수 없이, 장병들에게 살육을 엄금하는 지시를 내린 후 말을 돌려 경성으로 돌아가 황제에 즉위했다.
결과적으로 조광윤과 조보는 서로 상대방의 발전을 위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상호 이해하고 지지하는 관계는 인생에 좋은 기회를 맞게 해주는 기반이 되며 그것을 위한 조직적 조건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조보가 병변을 주도적으로 획책하여 조광윤을 하루 만에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은 필적할 바 없는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에 조광윤은 그에게 높은 관직을 맡기지 않았다.

그것은 후주의 관리들을 모두 있던 자리에 유임시켰기 때문에 줄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조광윤의 인품과도 관련이 있다.
조보도 마찬가지로 자만하지 않고 황제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학식자로서의 우수한 품성을 유지했다. 이것이야말로 조화로운 군신관계라 할 수 있다.
조보는 정식 관직이 아닌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를 달갑게 받아들였으며 추호도 원망하는 기색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추밀원에 출근했다.
조보는 추밀원에서 계속 병변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서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근무했다. 그가 이전에 막부에 있을 때는 매일 조광윤과 함께 대책을 강구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조광윤이 막상 황제가 되고난 후에는 국정에 바쁘다 보니 조보는 알현할 때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예전처럼 그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조보는 몸은 추밀원에 있었으나 마음은 항상 황제 조광윤과 함께 있었다.

“정말 그리워한다면 어찌 거리가 멀다할 수 있겠는가?” 조광윤과 조보가 그러했다.

 

조보는 조용히 추밀원에서 근 1년간 근무했다. 어느 날인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늦은 밤에 눈은 멎을 줄 몰랐다. 조보는 집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송태조 조광윤이 눈을 맞으며 찾아왔다.

깜짝 놀란 조보가 그에게 찾아온 연유를 묻자 조광윤은 마음속을 털어놓았다.
「침대 외에는 다 남의 것이니 잠을 이룰 수 없구려!」

이 말을 듣자 조보는 두 이씨(李氏)의 반란을 평정한 조광윤이 또 사분오열된 중국을 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그는 송태조와 함께 술을 나누면서 밤새도록 국정을 의논했다.
조보와 조광윤은 그날 밤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중국통일방침을 정했고, 그는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처음으로 국정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