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15)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2. 조광윤의 평생측근 조보(趙普)

 

송태조 조광윤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단연 조보(趙普)다.
그는 천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온힘을 다해 계책을 짜내는 ‘지혜의 주머니’ 지낭(智囊)이었다.
조보는 조광윤이 후주의 장군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 후 진교병변을 치밀하게 계획해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했다.
또 송태조 조광윤과 송태종 조광의가 재위하던 시절 명재상으로서 크고 작은 정책에 그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보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평생 측근 위징(魏徵)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본향은 유주(幽州) 계현(薊縣)으로 922년 후량의 마지막 황제 말제(末帝) 때 낙양에서 태어났고 조광윤보다 다섯 살이 많다.
그는 박식하고 다재다능하며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난세에 태어난 그는 학식에 의한 출로를 찾지 못해 후주 세종이 즉위할 당시 영흥(永興)절도사 영흥(永興)절도사: 축사아장(竺沙雅章)의 <조광윤전(趙匡胤傳)>에서는 ‘기흥군(機興軍)절도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사(劉詞)의 참모로 있었다. 오래지 않아 유사가 죽기 직전에 세종에게 “조보는 재주가 많은 인물이니 등용해 주옵소서!” 하고 간청했다.

 

송나라가 세워지기 4년 전 956년(세종3)에 전전도우후 조광윤이 저주(滁州)를 평정한 직후 그곳에 군사판관으로 부임한 조보와 처음 만나게 되어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깊은 교분을 쌓게 되었다.
후주 세종은 재상 범질의 추천에 의해 조보를 새로 평정해 얻은 저주의 군사판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 무렵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이 양주(揚州)에서 군사를 이끌고 저주에 왔는데, 그때 조홍은의 병이 깊어져 조보는 밤낮으로 약을 지어 올리며 극진히 돌보았다.
몹시 감격한 조홍은은 조보를 같은 종친으로 여기고 한 집안 식구처럼 대했다. 이리하여 조광윤과 조보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얼마 후에 조광윤은 광국군절도사 겸 전전도지휘사에 임명된 후 즉시 조보를 절도사추관(節度使推官)으로 추천하여 군무를 보좌하도록 했다.
어느 날 병사들이 백여 명의 도적무리를 잡았는데 조광윤은 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해야 했다.
그 때 단순한 법 적용에 의한 사형집행을 반대한 조보는 신중하게 심문을 거친 다음 다시 판결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80여 명의 무고한 자들이 석방됨으로써 그는 관리로서 일처리 능력을 과시했다.

조광윤은 이러한 그의 재능을 신뢰하게 되었고 높이 평가했다.

그 후 조광윤이 진(鎭)을 송주(宋州)로 옮겼을 때 조보가 장서기(掌書記)를 맡게 되어 막부의 제반 정무를 관리했다.
조보는 조광윤을 만나면서 마치 물고기가 큰 바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자를 허락하고, 용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女爲悅己者容, 士爲知己者死>”고 한다.
조보는 조광윤이 재덕을 겸비하고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를 평생의 모시기로 결심했다. 조광윤 막부에서 그는 공손하고 신중하며 정성을 다해 일하고 때로는 신중하게 때로는 공격적 스타일을 보이면서 최고의 책사로 떠올랐다.

그와 조광윤의 우정은 조광윤의 재능과 지혜, 인품과 덕성에 대한 탄복과 자신을 예우해준데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보는 조광윤을 늘 따라다니며 측근에서 충성스럽게 보좌했고, 특히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와 함께 진교병변을 치밀하게 계획해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했다.

후일 10년간 명재상으로 송태조와 송태종을 보좌하면서 송왕조의 굳건한 기틀을 마련하고 나라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가장 유력한 문신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보가 조광윤의 본적지인 탁주(涿州)와 인접한 유주(幽州)의 계현(薊縣)사람으로서, 북방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가 거란의 영토로 넘어간 이후 조광윤과 조보가 똑같은 실향민(失鄕民)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두 사람은 심정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조광윤은 그를 ‘장형(長兄)’이라 불렀고 그의 아내를 ‘형수(兄嫂)’라고 불렀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