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13)

제3절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조광윤

▶ 도서수집에 열성을 다하다

 

조광윤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고 도서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군시절 조광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면서도 군중에서 시간만 나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독서했고, 백성에게서 좋은 책을 발견하기만 하면 거금을 주고서라도 구입하곤 했다.
수레에 책만 싣고 귀성했던 조빈과 마찬가지로 그도 재물보다 책을 좋아하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
조광윤이 후주 세종을 따라 회남에 출정했을 때, 그가 수주(壽州)에서 사사로이 많은 재물을 챙겼다고 고발한 자가 있었다. 세종은 즉시 사람을 파견해 조광윤의 짐수레를 수사하게 했는데 발견한 것은 전부 책뿐이었다.
세종은 조광윤을 불러 물었다.
「경(卿)은 장수로서 갑옷을 입고 싸움만 하면 되는데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 많은 책을 소유한 것이오?」
조광윤은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뛰어난 지략이 없는 신(臣)은 항상 중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모으고 식견을 넓혀 지혜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독서에 있어서 세종은 도저히 조광윤을 따를 수가 없었다.
세종은 용병술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책 속에서 지략을 얻을 줄은 몰랐다. 독서를 좋아하고 책을 수레로 실어 나르는 조광윤은 책속의 지식과 현실을 결부시키면 지혜와 힘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장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황제 앞에서 독서의 필요성을 장황히 말할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황제가 된 후 천하는 황제의 것이 아닌 것이 없는 만큼, 장서도 개인 형식이 아니라 큰 도서관을 지어 수장하기로 했다.
그는 소문관(昭文館), 사관(史館), 집현원(集賢院) 등 삼관(三館)을 설치하여 천하의 도서를 수집하고 천하의 지혜를 모으기로 했다.
송나라 초기의 국가도서관은 후주의 것을 넘겨받은 것이어서 1만 2천권의 장서 밖에 없었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조광윤은 천하의 도서를 수집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는 각국을 평정할 때마다 도서의 수집에 유의했다.
963년(태조4)에 조광윤이 형남을 평정했을 때, 형남왕 고계충의 도서를 수집해 삼관을 채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서가 적었고 삼관의 한 구석마저 채우지 못했다.
965년(태조6)에 후촉을 평정했을 때에야 비로소 조광윤은 많은 도서를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후촉왕 맹창은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장서가 1만 3천권에 달했고 후주 세종의 장서보다도 많았다.
크게 흡족한 그는 즉시 우습유(右拾遺) 손봉길(孫逢吉)을 성도(成都)에 보내 도서를 삼관으로 옮기게 했다. 남당은 10국 중 도서가 가장 많았던 나라였다. 남당왕 이욱(李煜)은 뛰어난 문인이어서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으므로 궁중에는 도서, 종(鍾)과 왕들의 필적(筆跡)들이 아주 많았다.
976년(태조17)에 이욱이 투항하자 조광윤은 급히 태자세마(太子洗馬) 여구상(呂龜祥)을 금릉(金陵)에 보내 도서 2만 여권을 운반하도록 했다.
조광윤은 이와 같이 도서를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러 나라들을 평정한 후 원래 삼관의 장서보다 훨씬 더 많은 도서를 얻게 되어 황궁에는 국토가 광활한 나라에 걸맞게 풍부한 장서량을 보유하게 되었다.

 

도서를 수집하기 좋아하는 조광윤의 영향 하에 대신들도 책을 좋아하는 자가 많아졌다.
후촉을 평정한 동로군도감 조빈(曹彬)은 전쟁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갈 때 그의 행낭에는 도서와 몇 벌의 의류만 있었다.
후촉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조빈은 재화를 탐하지 않고 다만 책만 몇권 주어들고 돌아왔다.
조빈이 주장이 되어 남당을 평정하고 경성에 돌아올 때도 그를 마중나간 사람이 배 안에 적어도 강남의 보물이 더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책뿐이었고, 지난번 후촉에서 돌아올 때보다 책의 수량이 조금 많아졌을 뿐이었다.
서남전운사(西南轉運使)로 있던 급사중(給事中) 심륜은 후촉정벌군의 후군공급을 책임졌다. 후촉에 들어간 후 그는 푸성귀 등 변변치 않은 음식만 들었고, 경성(京城)에 돌아갈 때 그의 행낭에는 책 몇 권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조빈은 대장군이고 심륜은 재산을 관리한 사람인데 모두 책을 사랑하고 기회만 있으면 책을 구했으니 조광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책을 사랑하면 책을 읽게 되고, 책을 읽게 되면 식견이 나날이 향상하게 된다. 후에 조빈과 심륜은 다 재상직을 역임했는데 이는 책을 사랑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송태조 조광윤은 각 할거정권의 장서를 수집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또 유실된 도서를 널리 구하고 백성들의 도서헌납을 격려하는 조령을 반포했다.
「백성 중에서 서적을 헌납하는 자가 있으면 사관(史館)에서 그 책이름을 확인하고 사관에 없는 것은 수납하도록 한다.」
조광윤은 도서를 널리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새로 집필한 저서들의 간행과 편찬에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961년(태조2) 1월, 재상 왕부(王溥) 등은『당회요(唐會要)』 100권을 편찬해 조정에 바쳤다.
 
963년(태조4) 7월, 왕부 등은 또다시 『오대회요(五代會要)』 30권을 완성했다. 같은 해 10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 장소(張昭) 등은 『명신사적(名臣史迹)』 5권을 편찬했다. 이 저서들에 대해 조광윤은 다 친히 감수한 후 사관(史館)에 수장하도록 명했다.
조광윤은 재상 설거정(薛居正)에게 명하여 『오대사(五代史)』를 편찬하게 했다. 수시로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그의 지극한 관심 아래 974년(태조15) 10월에 150권의 역사서가 완성되었다. 송나라가 건국된 후 신하들이 앞 다투어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당나라 말기 이래 처음으로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조광윤은 또 전적(典籍)의 교감(校勘)에 대하여도 관심을 두고 소장한 서적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했다.
965년(태조6)과 969년(태조10)에 그는 위융(衛融), 섭숭의(聶崇義), 요서(姚恕), 진악(陳卾) 등 유명한 학자들에게 명해 『경전석문(經典釋文)』을 두 차례에 걸쳐 교감하게 했다.
수차례의 진지한 교감을 거쳐서야 재상 조보, 참지정사 설거정, 여여경 등의 서명이 이루어졌다.
973년(태조14)에 왕호(王祜)가 교정한 『신농본초(神農本草)』를 올리자 조광윤은 친히 심사하고 서문을 쓴 다음 전국에 반포하도록 명을 내렸다. 개국 초기부터 조광윤은 도서를 널리 대대적으로 수집하고 저술을 권장하며 교감에 정열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