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조 조광윤은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무예를 좋아하여 글 짓는 것은 귀족자제들이 즐기는 것으로 시간낭비라고 생각해 도외시했다. 그것은 돈 많고 시간 많은 귀족자제들이나 하는 사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역대 중국의 황제들과 비교해 볼 때 조광윤 자신이 쓴 글이 적다고는 하지만, 그는 남달리 독서를 좋아해 꾸준하게 무예를 익히면서도 유가경전과 병서(兵書) 등 역사서적을 탐독했다. 따라서 그는 늘 역사 경험 속에서 유익한 교훈을 섭취했다.
그리고 조광윤은 평소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으면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송나라 사람들은 문학을 숭상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송나라에 불후의 명작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宋代)는 진정 그들만이 지닐 수 있는 훌륭한 문화를 창조했다. 그들은 이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조광윤은 세 명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오경(五經)과 구경(九經)을 비롯한 유교경전과 역사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 중에서 그가 즐겨 읽었던 노자의 『도덕경』과 손무(孫武)의 『손자병법』은 그가 무장으로 있을 때나 황제가 되어서도 전략과 정책 수립에 유용하게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뛰어난 국가경영자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광윤은 무인이었지만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으므로 보통의 무인들과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책을 그렇게 좋아했던 데는 대대로 선조들이 유학(儒學)과 교양을 중시하던 관료가문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조홍은도 재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책을 좋아해 전쟁터에서 자주 책을 획득하여 자녀들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조광윤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는 집안 분위기가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독서와 교육을 장려한데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광윤이 무인 출신으로 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황제가 되었으면서도 무인정치를 하지 않고 문인정치를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그 결과 송나라가 중국 역사상 대표적이라 할 만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 신하들에게 독서열풍을 일으키다
송태조 조광윤은 전력을 다해 천하의 도서를 수집하면서 신하들이 독서열풍을 일으키도록 권장했다. 그가 독서를 권장한 것은 개개인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였지 결코 공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독서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치욕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기타 왕조의 전제 제왕들과 다른 점이다.
송태조는 신하들에게 여러 종류의 저서들을 탐독할 것을 권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조광윤은 후주시기에 많은 전쟁을 치르고 ‘백전백승한 장군’이며 오대시기에는 물론 중국 역사상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군사전략가이다.
그가 이러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역사서를 탐독하고 병서를 깊이 연구했기 때문이다. “책이란 써먹을 때가 되어서야 많이 읽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조광윤은 황제 자리에 높이 있었으나 독서에 있어서는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간주했다. 건국 후 나라를 다스리는데 온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독서를 많이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는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독서했다.
나라를 세운 첫해인 960년, 송태조 조광윤은 시중드는 신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짐(朕)은 모든 무신(武臣)들이 다 공부하게 할 것이오. 그래야 치국의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오.」
지금의 첨단과학기술로 무장된 군사력과 달리 그때의 무인들은 힘이 세고 잘 싸우는 자가 강자였다.
이러한 그들에게 독서는 마치 “소귀에 경(經) 읽는 격”이었다. 무인이 공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실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송태조는 특히 무신들에게 독서할 것을 권장함으로써 오대(五代) 이래 만연했던 무예만 중시하고 문화학습은 경시하는 사회기풍을 크게 호전시켰다.
본래 거만하고 횡포하여 문인을 무용지물로 생각하며 심지어 툭하면 문관들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무장들은 조광윤의 훈육과 설득, 그리고 격려 하에 모두 공부하기 시작했다. 싸울 줄 밖에 모르고 일자무식이었던 당진(黨進)마저도 공부하고 독서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인가 한번, 당진은 국경을 지키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떠나기 전에 황제에게 고별사를 올려야 했다.
조광윤은 글을 모르는 그를 고려하여 고별식을 생략한다는 하교를 내렸다. 그러나 승벽심이 강한 당진은 기어이 황제에게 고별사를 올리겠다고 우겼다.
그의 수하들은 하는 수 없이 미리 고별사를 써주고 외우도록 했다.
그러나 막상 고별식을 거행할 때 너무 긴장한 탓인지 꿇어앉아 아무리 생각해도 외웠던 고별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어 불쑥 한마디 내 뱉었다.
「신(臣)이 듣건대 상고(上古)시기에는 풍조가 소박했으니 어르신께서도 몸조심하옵소서.」
이 말이 끝나자마자 좌우에 있던 신하들은 황궁이 떠나갈 듯 폭소를 터뜨렸다. 사후에 어떤 사람이 고별사를 외우지 않고 왜 불쑥 그 두 마디를 했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외웠던 것을 그만 다 까먹어버렸네. 문인들을 보니 항상 고상한 말을 잘 쓰기에 나도 한번 흉내 내본 걸세. 어르신께서도 내가 공부 좀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이와 같이 송태조 조광윤은 독서를 좋아하고 독서할 것을 대대적으로 주창함으로써 문신이든 무신이든 관리와 큰 뜻을 품은 자들로 하여금 모두 글을 지을 줄 알고 독서하는 것을 영광으로 삼게 했다.
한 사회에 독서의 열풍이 일자 사회기풍은 날로 좋아졌다. 조광윤은 무신들에게 뿐만 아니라 조정의 문신들에 대해서도 편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문신들이 스스로 학식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수시로 수준을 높여 나라를 위해 보다 많은 기여를 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상 문신들은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황제가 솔선수범하여 공부를 하는데 따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송태조 조광윤은 오대(五代)시기의 후진 고조 석경당의 명신(名臣) 상유한(桑維翰)에 대해 아주 극찬했다. 많은 것을 아는 박식가이며 지혜와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재상 조보와 세상사에 대해 논의할 때 늘 상유한을 언급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유한은 널리 많은 것을 아는 훌륭한 재상이오.」
조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유한은 재물에 탐닉한 사람입니다. 만일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폐하께서는 그를 쓰지 않으셨을 겁니다.」
조광윤이 말했다.
「사람을 쓰는 데는 장점을 살려주고 단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 중요하오. 공부한 사람들은 안목이 좁아서 문제요. 그와 같은 사람은 십만 관을 주어 집안에 꽉 차게 한다 해도 아까울 게 없겠소!」
상유한은 원래 후당의 진사였고 박식하고 재능이 있었다.
그는 마치 조광윤에게 있어 조보와 같은 존재로서 후진 초기에 석경당의 장서기(掌書記)로 있으면서 그를 도와 황제가 되게 했고, 그를 위해 거란에 가서 도움을 청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거란왕이 있는 천막 앞에 꿇어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소신을 밝혀 끝내 거란왕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후진이 건국된 후 상유한은 집현전대학사, 추밀사 등의 중직을 역임했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많은 뇌물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후진 초기에 석경당을 설득해 성심성의로 번진들을 위로해 주고, 거란에 후한 예물을 바치면서 잘 섬기며 병졸을 훈련시키고 병력을 강화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국고를 충실히 하고 통상을 장려해 재화를 풍부히 함으로써 몇 년간 나라는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명철한 책략에 대해 조광윤은 감탄해 마지않았고 탐욕스러운 점은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후진을 안정시킨데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지혜가 뛰어난 신하를 얻으려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생(書生) 출신인 조보는 박식하고 다재다능하여 식견이 넓은 사람이다.
재상직에 있으면서 그는 가끔 교만할 때가 있었는데 조광윤의 지적이 있은 후로는 독서에 심혈을 기울였다. 늙어서는 서적을 몹시 사랑하여 역사서며 제자백가의 저서들을 많이 소장했다.
재상으로 있을 때 조보는 매번 조정에 대사가 있을 때마다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집에 돌아가면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작은 상자 안에서 책한 권을 꺼내들고 하루 종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집 식구들도 그가 무슨 책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상 그는 책을 보면서 시정(施政)의 대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새벽이 되면 대책은 거의 결정되곤 했다. 후에 조보가 세상을 떠난 후 식구들은 그 상자를 열어볼 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논어(論語)』 20편이 들어있을 뿐 다른 서적은 없었다.
조광윤은 소년시절에 사숙에서 유가(儒家)사상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그의 강한 도가(道家)정신은 아마도 5대조 할아버지 조현랑(趙玄朗)이 도교(道敎)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도인(道人)이었으며 그의 숙부 조경청(趙景淸)은 출가해 도사(道士)로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후일 그는 후주 세종을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지위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는 정세를 분석하고 책략을 세우며 조정의 관리들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배운 지식을 잘 활용했다.
그러므로 그의 수양, 도덕, 지식으로 이루어진 인격과 지혜에 대해 사람들은 높이 평가했고, 후주 조정의 문관에서 군부의 장군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와 사귀려 했다. 이것은 평소에 열심히 배워 쌓은 많은 지식을 생활 속에 활용한 결실인 것이다.
황제가 된 후 조광윤의 신분과 지위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즉 군사를 이끌고 싸우는 한 장군에서 천하에 군림하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독서와 학습의 습관은 예전과 똑같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진지하게 독서하는 외에 신하들과 모든 백성이 다 독서에 참여함으로써 독서열풍을 일으킬 것을 호소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모든 백성이 응시할 수 있게 하고 과거를 통해 관리를 발탁했다.
그는 또 무신들에게도 독서할 것을 권장해 그들로 하여금 성현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 치국의 이치를 터득하게 했다. “자질이 높은 자가 도(道)를 들으면 힘껏 이행한다.”고 한 노자의 말은 송태조 조광윤에게서 잘 구현되었다.
독서할 것을 주장하고 독서하기를 좋아한 조광윤은 성현의 글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정도(正道)를 깨달았기 때문에 문인을 중용하고 문화교육과 문인정치를 힘껏 실시하고 과거시험으로 전쟁을 교체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처사는 사회전반에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시대의 사회 풍조를 이끌었다. 송나라의 교육서적 『신동시(神童詩)』에서 “황제는 영웅호걸을 중용하고 문장은 그들을 가르친다네.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이요. 오로지 공부하는 것만이 고상하다네.”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조광윤은 공부를 위한 공부는 반대했다.
그는 시강(侍講)을 담당한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왕의 자제들의 당면과제는 경전을 학습하고 혼란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오. 쓸모없는 글짓기는 배울 필요가 없소.」
조광윤은 많은 책을 읽고 성현의 도를 터득해 그의 학문 수준은 누구 못지않게 높았지만, 글이나 시를 짓지 않았으므로 후세에 남긴 저서가 없다.
이는 마치 삼국(三國)시대에 촉한(蜀漢)의 유비와 제갈량이 남긴 글은 비록 적었지만 학문수준이 높았던 것과 같다. 만일 조광윤이 이론서적을 남겼더라면 후세의 제왕과 고관들이 참작할 좋은 경전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넓고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것과 같다.”고 한 노자의 말에 해당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