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3)조광윤이 이끄는 대군은 아침 일찍이 변경성을 떠나 동북방으로 40리를 행군하여 당일 오후 진교역(陳橋驛)에 도착해 주둔했다. 진교역은 당나라 때 판교(板橋)라고 불렸던 곳이며 변경에서 하루 걸리는 거리로, 사람들이 동북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친지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그 곳까지 가서 작별을 하던 곳이었다. 조광윤은 이날 저녁에 이번 전쟁의 전략을 곰곰이 구상하면서 술을 몇 잔 마신 후 지휘부의 군막에서 편안히 잠이 들었다. 이 잠이 깨고 나면 자신이 황제가 되어 있을 것을 그는 모른 채 말이다. 그때 군막에서는 천문지리에 밝은 문서관(文書官) 묘훈(苗訓)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오늘 천상(天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나 어두운 빛을 뿜으면서 한참 동안이나 싸웠다네.」 전령관(傳令官) 초소보(楚昭輔)도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마침 정월 초사흘 하늘에 갑자기 흑태양이 나타나 태양을 덮으니 세상은 삽시간에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후에 다시 태양이 떠올라서야 흑태양이 사라졌다. 묘훈이 해석했다. 「태양은 제왕을 상징한다네,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떴으니 이는 두 명의 제왕이 병립해 있다는 말일세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2)어린 황제가 즉위한 후 반년 동안 조용했던 조정은 960년 정월 초하루 대신과 무장들은 신년축하회를 열고 변경성은 명절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진주(鎭州)와 정주(定州)에서 긴급한 군사첩보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북한군이 토문(土門)에서 동쪽으로 내려와 거란군과 연합하여 침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황제는 세상사를 알 리 없고 변경성은 신년축하 분위기에 빠져 있는데, 이런 군사첩보가 날아왔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조정의 일을 집정하고 있던 범질, 왕부 등 재상들은 졸지에 당황했다. 재상 범질은 재상 왕부, 전전도점검 조광윤, 전전도지휘사 석수신을 급히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조광윤은 중후한 풍채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황제께서 북벌을 단행하시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아직도 우리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대업은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지금 북쪽의 적은 우리 유주(幼主)를 업신여기고 감히 병마를 일으켰으니, 모두 발해(渤海)의 차가운 물의 고혼(孤魂)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조광윤은 석수신을 보고 말했다. 「내가 나가 적을 맞겠으니 석장군은 도성에 남아 유주를 보호해 주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1)맹호 같던 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어린 공제(恭帝)가 등극하자, 장서기(掌書記) 조보(趙普)는 군심(軍心)과 민심(民心) 그리고 재상 왕부(王傅)와 위인포(魏仁浦) 등 조정대신들이 모두 조광윤의 황제옹립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정세동향을 조광윤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그는 조심스레 조광윤의 표정을 살피면서 의중을 떠보았지만, 신의를 중시하는 조광윤은 세종이 자신을 그토록 신뢰했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일축해버렸다. 사려 깊은 조보는 더 이상 조광윤에게 황위를 빼앗자는 간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폭풍처럼 밀려오는 시대흐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깊이 고민했다. 세상의 황제옹립 분위기에 순응하려면 우선 당사자인 조광윤 자신이 이를 허락하는 것이 선결과제인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이를 무리하게 강행한다면 선의의 조광윤을 엄청난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가 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차례 거친 피바람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외면한다면, 또 다른 야심가가 황제의 자리를 선점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보는 이 심각한 운명
제1절 황제 옹립 분위기를 피해 귀덕(歸德)절도사로 부임 (02)불과 53년 동안 왕조가 다섯 번이나 바뀌고 14명의 황제가 명멸했던 오대시기에는 무인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사회였다. 이처럼 무인들이 각지에서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분위기는 누구라도 군대의 힘만 있으면 한 지역을 차지하고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은 생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그는 중앙의 금군을 강화해 지방군이 감히 중앙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용맹을 갖춘 강력한 황제가 살아 있을 때나 유효할 뿐, 겨우 일곱 살인 어린 황제의 능력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세종이 죽고 세상물정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즉위했으니 과연 누가 천하를 제패하겠는가? 당시 전전도점검으로 있으면서 금군을 장악하고 있던 조광윤이 사실상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손쉽게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세종이 타계하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황제자리를 찬탈하려 하지 않고 새로 맡은 귀덕(歸德)절도사의 직책을 수행하러 의연하게 귀덕부(歸德府)로 떠났다. 이러한 행동은 여간 인덕을 갖춘
제1절 황제 옹립 분위기를 피해 귀덕(歸德)절도사로 부임 (01)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의 통치자는 세습, 정변이나 전쟁, 선출 등 세 가지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세습(世襲)은 혈통에 따른 것으로 가장 흔히 이루어진 방법이다. 세습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정변(政變)이나 전쟁(戰爭)을 통해 통치자가 되었다. 선출(選出)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조광윤은 평범한 무인집안 출신으로 세습 받을 작위가 없었기 때문에 정변을 통해 송나라를 세우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무혈병변으로 선양(禪讓)의 형식을 통해 황위에 올랐다. 그는 그것을 위해 남다르게 노력하고 인내했으며,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했다. 959년 5월 30일, 오대시기 제일 명군으로 꼽히던 세종은 거란에 대한 북정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도중에 병환으로 변경(汴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6월 18일, 5년 동안 재위한 세종 시영(柴榮)은 3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세종은 발병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두 달이 채 안 되고 또한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에 후사(後嗣)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화
제6절 싸우지 않고 거란의 3개 관문(關門)과 3개 주(州) 획득 (02)4월 28일, 조광윤이 먼저 와교관(瓦橋關)에 당도했다. 와교관을 수비하던 거란의 요내빈(姚內斌)은 호랑이 같이 용맹한 장수였다. 그래서 와교관을 공격하다가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으로 판단한 조광윤은 그가 관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요장군(姚將軍), 우리 두 군이 맞붙으면 쌍방이 다 인명 피해가 크게 될 것이오. 전국(戰國)시기 노(魯)나라와 추(鄒)나라가 싸울 때 장수는 30명이 죽었어도 병졸은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들었소. 오늘 우리도 장수끼리만 싸우고 병사들은 참전시키지 맙시다. 어떻소?」 이에 동의한 요내빈이 다가와서 결투를 시작하려 하자 조광윤이 또 말했다. 「거란은 고비사막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여유를 즐겨왔소. 석경당이 도(道)를 어겨 연운16주를 거란에 넘겼고, 그 후 거란은 밭농사를 하면서 국경을 지키느라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소. 오늘 진노한 중국은 연운(燕雲)을 잃은 수치를 씻기 위해 백만대군을 출동시켜 잃은 땅을 되찾으려 왔소. 거란이 저항한다면 피가 강을 이루고 백만 시체가 떠내려갈 것이오. 항복하고 잃은 땅을 돌려
제6절 싸우지 않고 거란의 3개 관문(關門)과 3개 주(州) 획득 (01)오대십국시기의 혼란상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울분을 느낀 세종은 천하평정의 의지로 불탔다. 남당을 귀속시키고 회남을 수복한 그는 다음 공격목표를 거란이 점유하고 있는 ‘연운16주(燕雲十六州)’로 돌렸다. 이 땅은 20여년 전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할양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후주는 북쪽 국경에 구멍이 뚫리고 방어에 피동적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세종은 반드시 잃은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땅을 수복하지 않으면 후주의 안전보장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연운16주’란 유주(幽州), 단주(檀州), 계주(薊州), 영주(瀛州), 막주(莫州), 탁주(涿州), 순주(順州), 신주(新州), 규주(嬀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운주(云州), 응주(應州), 환주(寰州), 삭주(朔州), 위주(藯州)이다. 959년 3월 하순, 세종은 친히 군사를 통솔하여 유주를 진공하기 위해 북상했다. 후주군은 대군을 두 개 부대로 나누어 시위마보군부지휘사 한통(韓通)은 육로군 주장을 맡아 마보군을 통솔하고, 전전도지휘사 조광윤은 수로군 주장을 맡아 수로로 북정하도록 명했다. 전에 세종이 이미 북운하를 건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8)8. 청구전투(淸口戰鬪)에서 남당 주장 진승소(陳承昭) 생포 남당수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세종은 회하 북안에서, 조광윤은 회하 남안에서, 후주수군은 물살을 타고 동진하여 3로(三路) 대군이 함께 청구로 향했다. 오랜 세월 행인이 없던 회하강변은 갈대로 뒤덮여 길과 수렁을 분간키 어려웠다.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조광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갈대가 뒤덮인 늪과 구덩이 천지였다. 그는 기마의 우세를 빌려 진창의 늪을 신속히 빠져나갔다. 작전에서 조광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신속성이었다. 그는 보병을 뒤로 제치고 기마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전진했다. 예기치 못한 전술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작전술인 만큼 그는 청구의 남당군에게 불의에 타격을 안겨주려 했다. 선봉(先鋒)에 선 그는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수군보다 60리(里)나 빨리 달려 먼저 청구에 당도했다. 청구의 남당주장 진승소는 갑자기 나타난 후주군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해 온 조광윤은 남당군을 격파하고 주장 진승소를 생포했다. 그리고 함대 300척을 노획하고 7천여 명을 생포했다. 회하에 있는 남당의 전투함대는 전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7)6. 낙타부대(駱駝部隊)로 ‘십팔리탄(十八里灘)’을 도강(渡江) 후주는 남당의 수주를 탈취한 후 비로소 회남에서 제대로 발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회남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남당에 속해 있었다. 세종의 야심은 남당의 강북 땅을 모두 손아귀에 넣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년동안 정비를 거친 그는 회남으로 3차 출정을 떠났다. 이번 회남출정에는 조광윤이 주장(主將)을 맡았다. 그로서는 큰 전쟁에서 처음으로 주장을 맡는 기회였다. 그는 이미 뛰어난 전략전술로 세종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그 동안의 화려한 승전보가 말해주듯이 세종은 이번 회남출정에서 승리의 확신을 가졌다. 957년(세종4) 10월 19일, 세종은 변경(汴京)에서 출발해 11월 4일 진회군(鎭淮軍)에 당도했다. 당일 밤 오경(五更)에 회하를 건너 호주(濠州)에 도착했다. 이때 남당의 호주단련사 곽정위(郭廷謂)는 후주의 공격을 방비하기 위해 호주성 사면에 튼튼한 방어망을 구축해 놓았다. 호주성 동남쪽의 회하에는 십팔리탄(十八里灘)이라는 얕은 여울이 있었다. 곽정위는 여울 주위의 수중에 말뚝을 박고 진영을 구축해 놓고 대소 함대 200척을 정박시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6)5.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주성(壽州城) 함락 세종은 육합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광윤을 전전도지휘사 겸 광국군(匡國軍)절도사로 승진시켰다. 이로부터 조광윤은 대장군 반열에 들게 되어 군사적 지위가 확고하게 되었으며, 조정의 중신이 되었다. 조광윤과 같은 명장이 있었지만, 회남에서 장기전을 벌여온 후주군은 지치고 군량과 마초의 공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세종은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 그리하여 세종은 회남절도사 향훈(向訓)에게 양주를 지키고, 이중진에게 계속 수주를 공격하도록 명하고는 조광윤을 비롯한 나머지 대군을 이끌고 변경(汴京)으로 돌아갔다. 이때를 틈탄 남당왕 이경은 이경달을 시켜 병력을 보완하고 국력을 한데 모아 후주군에 반공을 가했다. 세종이 이미 대군을 거느리고 본 국으로 돌아갔고 후주군 전력(戰力)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남당왕은 잃었던 많은 땅을 되찾게 되었다. 양주를 지키고 있던 회남절도사 향훈은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자, 세종에게 양주에서 철수해 전력 수주를 공략할 것을 건의했다. 세종이 이에 동의하여 향훈이 양주에서 철수하자 후주군은 모두 수주성 밑에 집결했다. 남당의 충신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