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01>

제1절 황제 옹립 분위기를 피해 귀덕(歸德)절도사로 부임 (01)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의 통치자는 세습, 정변이나 전쟁, 선출 등 세 가지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세습
(世襲)은 혈통에 따른 것으로 가장 흔히 이루어진 방법이다. 세습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정변(政變)이나 전쟁(戰爭)을 통해 통치자가 되었다. 선출(選出)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조광윤은 평범한 무인집안 출신으로 세습 받을 작위가 없었기 때문에 정변을 통해 송나라를 세우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무혈병변으로 선양(禪讓)의 형식을 통해 황위에 올랐다. 그는 그것을 위해 남다르게 노력하고 인내했으며,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했다.

 

959년 5월 30일, 오대시기 제일 명군으로 꼽히던 세종은 거란에 대한 북정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도중에 병환으로 변경(汴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6월 18일, 5년 동안 재위한 세종 시영(柴榮)은 3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세종은 발병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두 달이 채 안 되고 또한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에 후사(後嗣)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화급한 상황에서 세종은 부언경
(符彦卿)의 딸 부씨(符氏)를 황후로 책봉하고 큰아들 시종훈(柴宗訓)을 양왕(梁王)으로, 작은아들 시종양(柴宗讓)은 연공(燕公)으로 봉했다. 범질(范質), 왕부(王溥), 위인포(魏仁浦)세 명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지 이틀 후인 6월 20일, 조서를 선포하고 양왕 시종훈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 공제
(恭帝)로 등극했다. 그가 황위에 등극할 때 나이는 겨우 7세였다. 시영의 경우도 곽위와 마찬가지로 후한의 은제가 가족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에 그 후에 낳은 아들은 어릴 수밖에 없었다. 영명했던 군주가 뜻밖에 병사하고 어린 황제가 보좌에 오르니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조정 안팎에서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전도점검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시키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불과 53년 동안 왕조가 다섯 번이나 바뀌고 14명의 황제가 명멸했던 오대시기에는 무인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사회였다. 이처럼 무인들이 각지에서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분위기는 누구라도 군대의 힘만 있으면 한 지역을 차지하고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은 생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그는 중앙의 금군을 강화해 지방군이 감히 중앙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용맹을 갖춘 강력한 황제가 살아 있을 때나 유효할 뿐, 겨우 일곱 살인 어린 황제의 능력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세종이 죽고 세상물정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즉위했으니 과연 누가 천하를 제패하겠는가? 당시 전전도점검으로 있으면서 금군을 장악하고 있던 조광윤이 사실상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손쉽게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세종이 타계하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황제자리를 찬탈하려 하지 않고 새로 맡은 귀덕
(歸德)절도사의 직책을 수행하러 의연하게 귀덕부(歸德府)로 떠났다. 이러한 행동은 여간 인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귀덕절도사의 직책을 맡을 때 조광윤은 전전도점검과 검교태위를 겸하고 있었다. 귀덕절도사에 부임한 후, 어느새 반년을 훌쩍 넘겼다. 신년 정초가 되어 군에 변고가 생겨서야 변경(汴京)에 들어가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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